‘66년’ 동안 지속되던 관행의 끝
2020년 12월 말, 중국의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는 예상치 못한 결정사항을 발표했다. 중국 소수민족과 관련된 업무와 권익 보호를 담당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国家民族事务委员会) 위원장이던 몽골족 출신의 바터얼(巴特尔)을 대신해 천샤오장(陈小江)을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천샤오장은 1954년 이후 소수민족 출신이 소수민족을 관리하던 관행을 깨트린 최초의 한족 출신 위원장이자, 소수민족 관련업무와는 무관한 이력의 중국공산당 중앙기율위원회 출신이다. 그의 전격적인 발탁이 던지는 메시지를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위원장 교체 결정을 두고, 지난 9월 중국의 새 학기 시작과 함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서 표준 중국어 교육 강화 정책에 반대해 발생했던 등교거부 시위에 대한 중국정부의 경고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왔다. 바터얼이 대학에서 몽고어를 전공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시진핑 시대의 당-국가는 이미 2018년 당정개편을 통해 국가민족위원회를 통일전선부 산하로 배치하면서, 소수민족의 자치권과 권익보호 역할보다 ‘소수민족 문제’를 정치적 관리대상으로 삼는 데 주력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번에 ‘한족’ 위원장을 임명한 것은 당-국가가 위원회에 사실상 ‘조종(弔鐘)’을 울린 것이며, ‘한족 중심주의’에 따른 소수민족 동화정책을 공공연하게 추진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954년 중국헌법에 명시되었던 ‘민족구역자치(民族区域自治)’라는 사회주의적 소수민족정책의 이념적 지향이 ‘한족’ 위원장의 임명을 거치면서 마지막 남은 ‘상징성’마저 뿌리 뽑히는 상황에 이르고 만 것이다.
‘중국 모델’의 사회주의 (소수)민족 정책
사회주의 민족정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기원은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1913)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탈린은 민족을 “언어, 영토, 경제생활, 공통의 문화에 표현된 정신적 구성물”에 기반해 “역사적으로 진화한 안정적인 공동체”로 정의했다. 당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는 민족들의 문제가 자본주의 철폐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으며, 따라서 러시아 제국의 모든 민족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 속에 연대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10월 혁명’ 이후 내전 과정에서 각 민족으로부터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자결권’과 ‘분리독립권(rights of secession)’을 인정하며 공동의 번영을 약속했다. 그 결과 각 민족단위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는 각 민족이 스스로 통치하는 ‘공화국’을 전제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별도로 유엔에 가입해 독립된 투표권을 행사했다. 소련에서 처음으로 현실화된 사회주의 민족정책은 ‘영토’를 기반으로 한 ‘공화국’의 형태를 인정해 스스로 통치하는 것을 강조했고, 개인의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 상호간의 ‘실질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지원 정책을 마련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 이후 민족정체성 확인, 불평등 해소, 자치라는 사회주의 민족 정책의 기본 노선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민족에 대한 스탈린의 정의에 따라 민족정체성에 대한 확인과 범주화 작업(소수민족식별작업)이 진행되었고, 경제와 문화적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적 지원들이 펼쳐졌으며, 자치구 지정을 통해 양성된 소수민족 지도자들이 자치정부를 구성해 ‘민족 문제’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연방’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모델’은 소련과 다른 경로를 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 건설 초기부터 신장과 티벳 등에서 분리주의 움직임과 대만문제가 있었고, 소수민족 인구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소수민족의 전통적인 거주 지역은 중국 전체면적의 50~60%에 달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했다. 또한 덩샤오핑이 1950년 “남서부 소수민족” 관련 담화에서 밝혔듯, 역사상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소원(疏遠)한 관계는 뿌리가 깊고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 소련과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1954년 헌법에 민족 자치권에 대한 명시를 포함하는 대신 각 민족의 ‘분리독립권’에 대한 보장은 제외했다. 이러한 소련과의 차이는 ‘자결권’에 대해 제한적이고 양가적인 성격을 띤 ‘중국적 소수민족 정책모델’로 귀결됐고, ‘한족 중심주의’가 중앙과 자치정부 사이의 위계관계로 재활성화 되는 역설을 낳았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소수민족의 ‘민족적 이해(interest)’ 혹은 ‘분리독립’에 관한 주장을 ‘적’으로 간주하고 폭력과 파괴를 자행했던 역사는 ‘민족자치’에 관한 양가적인 모델이 내재한 모순이 빚어낸 파국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의 소수민족 정책
사진 1. “베트남 민족공동체” [베트남 건국 60주년 기념우표(2005년)]
각 민족 남녀를 묘사한 우표와 함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국가 휘장과
“베트남 국가는 하나, 베트남 민족은 하나”라는 호찌민 주석의 발언이 적혀 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 오늘날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적어도 베트남전쟁 종전 이전까지는 ‘중국모델’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북베트남은 중국과 ‘종족경관(ethnoscape)’이 흡사했다. 다수 종족인 낑족(dân tộc Kinh, 비엣족 Việt; 중국에서는 징족 京族)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고 있다는 점(2019년 인구조사 통계기준 86.2%)에서 중국에서 한족이 다수인 상황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낑족과 소수민족들이 소원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점도 유사하다. 다만, 북베트남의 경우 1940년대 이후 ‘비엣밍(베트남 독립동맹의 약칭)’ 세력이 베트남과 중국의 접경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초기부터 북부지역 소수민족의 지지와 지원은 필수적이었는데, 눙(Nùng)족인 쭈반떤(Chu Văn Tấn)과 따이(Tày)족인 호앙반투(Hoàng Văn Thụ)등 소수민족 출신 간부들이 비엣밍 세력과 북부산악지역을 연결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호찌민도 눙족의 이름을 사용하며,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의 비엣밍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뒤섞여 있었고 낑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정치노선이 매우 강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소수민족 ‘영토’에서 장기간 활동한 경험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경험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민족자치에 관한 내용을 명시한 이후, 뒤이어 베트남민주공화국도 1955년 ‘정부의 민족정책’(Sắc lệnh 229 chính sách dân tộc Chính phủ)을 공포하였다. 이 ‘민족정책’의 제2조는 민족들 사이의 모든 경멸(khinh rẻ), 민족에 대한 억압과 분리, 대민족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한 금지를 명시하였다. 제6조에는 모든 소수민족이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자유와 풍속과 관습을 보존하고 개선하며, 종교적 자유를 누릴 권한을 인정하고, 정부가 정치경제와 문화사회 전반에 대한 발전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중국의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해당하는 민족분과위원회(Tiểu ban Dân tộc, 오늘날의 민족위원회 Ủy ban Dân tộc)도 소수민족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자치구 지정도 곧바로 진행되었다. 1955년에는 북서부 국경지역 소수민족 영토를 포괄하는 타이-메오 자치구(Khu tự trị Thái-Mèo, 1962년 떠이박 자치구로 개명 Khu tự trị Tây Bắc)가, 1956년에는 북동부 국경지역의 소수민족 거주지들을 포괄하는 비엣박 자치구(Khu tự trị Việt Bắc)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자치구 설치에 관한 규정은 1959년 베트남민주공화국 헌법에 명시되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도 소수민족 자치권을 두고 복잡한 현실적 고려와 정치적 계산이 불가피했다. 타이-메오 자치구는 북베트남 지역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50여만 명의 인구와 12개~19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며, 프랑스 식민지 시기 이른바 ‘분리에 의한 통치’ 전술에 따라 ‘자치주’로 승격되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족 중 상당수는 비엣밍에 대한 정치적 반대세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은 ‘민족자치’에 관한 ‘중국모델’로부터 베트남이 이탈하는 상황을 낳았다. 중국의 모든 소수민족자치구에는 각 소수민족의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는데, 베트남은 1962년 타이족과 메오족(훗날 흐몽 H’Mông으로 지칭)의 이름을 지우고, 이를 (하노이를 기준으로 한 단순한 지리적 명칭인) ‘북서부 자치구(떠이박 자치구)’로 개명하였다. 베트남의 분단 상황이 소수민족 정체성을 확인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더디게 만든 측면도 있으나, ‘혁명’기간 동안 유예되었던 ‘낑족 중심주의’가 부활하면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지리적 규정성이 강화되고. 소수민족 정체성은 ‘자치구’ 명칭에서 사라져갔다.
베트남이 ‘중국모델’로부터 급격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쟁 종전 직후이다. 통일된 베트남은 1975년 말 국회 의결을 통해 두 개의 자치구 모두를 해산시키고 일반 행정구역으로 재편하였다. ‘통일’ 베트남의 새로운 행정구역 개편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나, 소수민족의 ‘자결권’이 무시된 채 국회의 결정을 통해 ‘자치권’을 회수한 것은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베트남과 중국관계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1979년 2월 베트남과 중국사이에 국경전쟁이 발발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국경전쟁은 베트남 북부 국경지역과 중국의 운남성과 광시성지역에 걸쳐 거주하는 ‘동일한’ 소수민족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베트남은 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1979년 3월 2일, “베트남 전체 민족 구성 목록”(Danh mục các thành phần dân tộc Việt Nam)을 발표하고, 베트남이 54개의 민족(낑족을 제외한 53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표하였다. 중국의 경우 1954년 첫 인구 총조사에서 39개의 소수민족을 인정하고, 1964년에는 그 수가 54개 민족으로 증가했으며, 1979년에 기낙족(基诺族)을 추가하여 전체 56개 민족으로 구분하고 있다. 베트남은 중국의 소수민족 분류체계와 완전히 다른 ‘베트남의 분류체계’를 공표하여 베트남과 중국의 소수민족의 ‘차이’를 부각시켰다. 특히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을 비교했을 때 분류체계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중국의 윈난성과 광시성 지역의 소수민족은 모두 13개로 분류되는데, 베트남은 무려 26개의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였다. 물론, 낑족(중국의 징족), 하니(Hà Nhì)족 등 동일한 이름으로 분류된 민족도 있지만, 예를 들어 한족은 베트남에서 호아(Hoa)와 응아이(Ngái)로, 중국의 태족은 베트남에서 타이족과 르(Lự)족으로, 야오족은 베트남에서 자오(Dao), 빠텐(Pà Thẻn), 산지우(Sán Dìu)등 3개 민족으로, 좡족은 무려 5개 종족-따이, 눙, 뿌뻬오(Pu Péo), 라찌(La Chí), 산짜이(Sán Chay)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상이한 민족분류체계의 공식화는 단순한 인류학적 연구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양국간의 전쟁이 촉발시킨 베트남의 소수민족에 대한 ‘인구통제’의 정치적 기술에 다름아니다. 베트남의 소수민족 정체성 분류체계는 중국에 대한 대항적 ‘시민권’을 확정하려는 정치적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중국과 베트남은 소수민족정책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민족정체성을 상이하게 ‘호명’해내면서 각각 ‘분리독립’된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의 차이를 선언한 셈이 되었다.
다수 민족의 삶이 중요하다? – ‘평등’과 ‘공정성’의 그늘
오늘날 중국과 베트남은 외교관계 정상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의 우호관계인 ‘포괄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에 있다. 닫혔던 국경이 다시 열리고 국경지역 소수민족의 자유로운 국경 통행과 무역 활동도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양국 모두에서 ‘탈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전면화되면서 소수민족의 상황은 다시금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자치권과 정체성의 측면에서 이미 큰 차이를 보여왔지만, 최근 들어 소수민족 지원정책의 전환에는 동일한 길을 걷는 모습이 흥미롭다.
무엇보다 소수민족의 정치-경제적 지위와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양국 모두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던 소수민족 교육정책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의 경우 대학입학시험에서 소수민족자치구의 ‘특권’에 대한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이른바 ‘가오카오(高考) 이민자’ 문제를 해소하고 기회의 ‘공정성’을 제고한다는 명분에 따라 2019년부터 소수민족자치구에 대한 특권이 폐지되었다. 베트남 또한 2020년 12월 초에 공표된 새로운 소수민족 특별입학제도에 따라 2021년부터 소수민족의 특별입학 조건이 한층 까다로워질 예정이다.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체제 속에서 도시에 거주하는 ‘다수 민족’의 삶이 불안정해지자, 소수민족의 삶에 ‘평등’과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소련에서 레닌은 사회주의적인 민족 정책이 처음 논의되고 실행되던 시기, 혁명은 단지 법적인 평등을 제공할 뿐이고 ‘프롤레타리아트’ 정부와 지도자들은 ‘실질적 평등(equality de facto)’를 실현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단순한 자유주의적 ‘평등’과 ‘공정성’의 논리로 오늘날 소수민족문제를 사고하는 것은 ‘사회주의 소수민족정책’과는 거리가 멀다. ‘소수민족’에 대한 최초의 사회주의적 인식이 지녔던 잠재성이 ‘평등’과 ‘공정성’에 관한 자유주의적 담론으로 대체된다면, 불평등의 구조화를 막을 길은 없을지도 모른다. 자치와 정체성의 문제가 사회주의 소수민족정책에서 늘 정치적으로 사고되고 ‘동원’의 기술로 활용되어왔던 역사가 어두운 과거라면, ‘실질적 평등’의 실현에 눈감는 정책의 변화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또다른 부역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심주형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참고문헌
심주형, 「탈냉전시대’ 베트남 북부 소수민족 삶의 초국성(trans-nationality) 」『열린 동남아: 초국적가적 관계와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 심주형, 김소연, 이한우, 배기현, 윤대영 편, 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Pelley, Patrica M., Postcolonial Vietnam: New Histories of the National Past,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2.
Rong, Ma, “Ethnic Relations in Contemporary China: Cultural Tradition and Ethnic Policies Since 1949” Policy and Society, 25:1, 2006, 85-108.
South China Morning Post, “China roots out its ‘gaokao migrants’ as university entrance exam nears” (2019. 5. 7.)
South China Morning Post, “China puts Han official in charge of ethnic minority affairs as Beijing steps up push for integration” (2020. 12. 19.)
Voice of America (VOA), “Inner Mongolians Boycott Classes to Protest Chinese Language Policy”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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