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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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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소개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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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경위와 운영-대구화교협회소장 편액을 근거로-, 대구경북연구19권 제3, 2020.11.30., 1-24쪽.


본고는 위에서 대구화교협회소장의 각종 편액과 중국과 대만 소장의 당안 자료를 활용하여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경과와 운영에 대해 검토를 했다. 검토 결과 도출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구화교소학의 설립은 중일전쟁 시기 조선총독부의 화교에 대한 이동과 송금 제한으로 가족 단위 이주가 늘어나면서 학령기의 아동에 대한 교육문제가 배경에 있었다는 점이다. 대구중화상회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언어의 장벽이 존재했고, 화교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보내는데 소극적이었다.


둘째,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주체는 대구중화상회와 그 임원이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대구중화상회의 모문금 주석을 비롯한 임원은 소학 설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경상북도청과 주부산중화민국영사관 등에 인가와 보조금 원조를 요청하여 관철시켰다.


셋째, 대구화교소학의 인가를 경상북도청으로부터 받은 것은 19418, 정식으로 개교한 것은 19432월이었다. 대구화교소학 발기인은 학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대구와 경상북도 군 지역에 모금활동을 전개했으며, 그 결과 136()의 화교 개인, 상점 그리고 중화요리점으로부터 6,350원을 모금했다. 조선총독부가 화교의 타 지역 이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경성과 인천 등지의 화교사회로부터는 모금을 할 수 없었다.


넷째, 대구중화상회는 해방 후 대구·경북의 화교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기존의 대구중화상회의 건물 내 2개의 교실로는 학생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교사 확보에 나서, 당시 대구의 가장 호화로운 서병국주택을 매입했다는 점이다. 이 서병국주택은 화교 건축청부회사인 쌍흥호에 의해 1929년 건축된 건물이었다. 대구화교소학의 교동회가 중심이 되어 서병국주택 매입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 대구·경북은 물론 서울, 인천, 군산 등지로부터 568만여원이 모금되었다. 구 중화상회 매각비 등을 합해 약 700만원으로 서병국주택을 매입, 대구화교소학의 새로운 교사로 사용했다.


다섯째,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의 교육은 왕징웨이 남경국민정부의 교과과정과 편찬의 교과서를 사용했고, 해방 후는 중화민국(대만) 정부의 교과과정과 교과서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온 화교인구의 증가로 대구화교소학의 학생수는 1957329명에 달해, 한성, 인천, 부산화교소학에 이어 4번째로 많았다. 경상북도 지역의 화교인구 증가와 중화민국 정부의 정책으로 1952년을 전후하여 포항, 경주, 안동, 김천, 영천에 각각 화교소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화교소학이 1940년대와 1950년개 대구·경북지역에 설립되어 운영된 것은 화교에게 그들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화교사회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지역사회의 입장에선 외국인 가운데 전체의 9할 이상을 차지한 화교를 수용하여 교육분야에서 다문화공생사회의 첫 시도를 한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