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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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딸들, 그들의 부모 그리고 국가 2 _ 안병일

앞서의 글들에서 이야기했듯이 필자의 박사논문 주제는 공산당이 추진한 1950년대 초반 산파개혁과 이를 둘러싼 중국의 국가, 향촌사회, 그리고 중국 가족과 여성간의 관계변화였다. 당연히 중국사회에서 딸의 지위라는 주제는 필자의 연구분야 밖에 있었다.

 

이러한 필자가 딸들의 가족 내에서의 지위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중국 최대의 명절인 설 기간 동안 엿볼 수 있었던 딸들의 약진이었다. 2006년 초, 필자는 우연히 산서의 B촌에서 설을 맞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설은 떡국을 먹고 세배하고 차례를 지내는 설 당일의 아침이 하이라이트라면, 중국인들에게는 바로 설 전날 온 가족이 모여 설을 준비하며 먹는 전날의 저녁을 그 정점으로 친다. 그렇게 먹는 저녁만찬이 영어로는 흔히들 ‘reunion dinner’로 번역하곤 하는 퇀위안판(团圆饭)이다. 말하자면 흔히들 한국의 전통 명절이 그러하듯이,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자신이 속한 가부장적 가족의 결속력을 과시하고 확인하는 그런 행사인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전직 촌장인 왕() 아저씨네의 퇀위안판에 초대 받아 찍은 아래의 사진은 어떻게 이러한 남성중심의 가계를 기념하는 행사가 딸들에 의해 점령되었나를 증언하고 있다. , 23녀를 둔 전직 촌장의 이 중요한 만찬에는 아들도 며느리도 없었다. 왕아저씨를 중심으로 필자, 둘째딸의 아들, 둘째딸, 둘째딸의 딸, 그리고 큰 아들의 아들(장손), 왕아저씨의 부인이 이렇게 사진에 나오고, 사진을 찍은 사람은 막내딸이었다. 나중에 들른 큰딸을 합치면, 결국 세 딸들이 모두 참석한 반면, 막상 아들들의 가계구성원으로는 장손 하나 달랑 참석한 것이었다. 이러한 딸들의 약진은물론 신문기자로 설날의 동향을 보도해야하는 큰아들과 군인이라 참석하지 못했던 둘째 아들의 사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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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경우는 어느 정도는 예외적이었다. 왕아저씨가 촌장이었을 시절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딸들을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 주었고, 큰딸의 남편이 장인의 자리를 물려받아 현직 촌장에 있었기에 딸들이 친정의 가족 행사를 중요시하는지도 모른다. 반면, 광산업을 크게 하는 부자집에서 시집온 큰아들의 며느리는 성의 수도인 타이위안(太原)에서 마련된 바로 자신의 친정 퇀위안판에 참석하였던 것이다.--큰아들의 딸이 호주로 유학 중인데 그 비용의 대부분을 친정에서 도와준 것도 분명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향성만은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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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다음날인 설날 아침식사에 초대해 주었던, 은퇴한 마을의사인 위()아저씨네 댁에서 그러한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직업과 경험 때문에 필자의 소중한 인터뷰 대상이었던 위아저씨에게는 아들만 셋이 있다. 그 중 막내아들은 은퇴한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필자에게 현재 향촌의 출산관행에 대해 현장감 있는 정보를 전해주어 지금까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설날 아침의 식사는 마치 촌장댁에서의 딸들의 약진을 부정하듯, 3명의 아들과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위아저씨와 막내아들 내외와 필자가 아래의 사진을 찍은 직후에 발생했다. 3명의 며느리가 모두 동시에 택시를 불러서 아이들과 남편을 데리고 친정에 점심 먹으러 가버린 것이다. 설거지는 모두 시어머니의 몫으로 남겨놓고서 말이다. 위아저씨는 딸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 거라며 멋쩍어했다.

 

이러한 친정과 딸들의 돈독한 관계는,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중국 정부가 50년대 추진한 집단농장화,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진행한 집단농장의 해체, 그리고 시장경제의 성장, 마지막으로 다음 연재 글의 주제인 산아제한 운동의 영향이었다. 먼저, 이미 지난 연재에서 살펴보았듯이 집단농장화는--최소한 집성촌이 발달하지 않은 북중국에서는--상당수의 딸들이 자기 마을의 협동농장에서 같이 일하던 청년들과 만나 결혼할 수 있는, 그래서 유사시에 친정의 도움을 받거나 친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 효과를 과장할 수는 없는 것이 필자가 듣기에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다른 마을에 사는 친정을 방문하는 것은 설 연휴의 끝자락이나 친정에 누가 결혼하는 경우가 아니면 드물었다고 한다. 결혼한 딸들은 며느리로서 집안의 노동점수의 중요한 소득원이었기 때문에 자주 시간을 내서 친정을 방문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집단농장의 해체와 시장경제의 도입은 딸과 친정간의 관계를 변화시킨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단 집단농장의 해체는 농촌의 많은 잉여 노동력이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생산활동에 참여하게 하였고, 동시에 이는 각 가정이 자신에게 분배된 땅을 자율적으로 경영해 산물을 세금과 수매의 형태로 정부에 내는 가정승포책임제의 도입을 가지고 왔다. 80년대 초반, 많은 농촌 가정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농업을 여성에게 맡기고 아들이나 남편들이 주로 이주 노동자로 품팔이 나가게 되는데, 여성들이 힘에 부치는 밭갈이나 파종, 수확때 도움을 청하게 되는 곳이 주로 친정의 남자들오빠와 아버지--이었던 것이다. 자연 친정과의 연대가 강화되고 남편도 처남이 형제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도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참여한 일상적인 대화에서 농번기에 처남댁으로 일주일 정도 도우러 가는 것은 빈번한 소재였다.

 

80년대 이후 늘어난 대중교통, 90년대 이후 휴대폰의 보급, 2000년대 자동차의 보급은 다른 마을로 시집갔던 딸들도 이전의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친정과의 지속적인 유대를 가지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왕아저씨의 둘째 딸은 타이위안에 살고 있지만, 필자가 갈 때마다 거의 매번 만날 수 있었다. 타이위안에서 그녀의 친정까지는 필자가 처음 중국 현지조사를 시작했던 2005년에는 5시간 이상이 걸렸지만, 지금은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2시간 반이 걸리며, 그녀가 결혼 할 때만 해도 10시간 이상 거리였다고 한다. 친정까지의 물리적/정서적 거리가 그렇게 가까워진 것이다. 실제 그녀의 둘째 아들은 아예 2006년 겨울 방학 전체를 외가에서 보냈다. 또 왕아저씨의 막내딸은 B촌 주변의 도시에 살지만, 자신의 차를 가진 덕분에 20분 거리를 운전해 매주 부모님을 방문했다. 위아저씨네 세 며느리가 설날 아침 택시를 불러 친정에 간 것도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80년대 후반이후 여성이 이주노동자의 대열에 참여하며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동시에, 농민공의 증가와 시장경제의 발달은 많은 부모들이 딸들에게 부양을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아들들이 아버지의 농토를 나누어 가지고 대신 부모의 노후를 책임졌던 전통적인 부양방식은 집단농장의 건설로 타격을 받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아들들이 대부분 같은 마을에서 일하며 그들의 집단농장의 수익으로 부모를 봉양했던 것이다. 부모는 토지를 물려주지는 못하지만, 결혼을 중재하고, 보통 가족의 연수입의 2~3년분을 초과하는 아들의 결혼 비용을 대고, 신혼집을 마련해주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거래는 아들들이 외지로 나가 농민공이 되고, 경우에 따라 외지에서 만난 여자와 편의에 따라 결혼을 하고, 자신의 결혼 비용을 직접 번 소득으로 치르게 되면서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 틈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딸들이었다. 정서적으로도 훨씬 살가우며, 자신이 벌어들인 소득에 대한 처분권을 쥐게 된 딸들이 자기 집만 챙기는오빠와 남동생들을 대신하며 부모님들의 봉양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바로 왕아저씨네 퇀위안판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딸들의 약진의 가장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華北 농촌 관행 조사 8】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