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맨해튼의 차이나타운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동상을 보고 누굴까 궁금해서 다가가보니 “세계 금독(禁毒)운동의 선구자”라는 설명이 달린 린쩌쉬(林則徐)였다.
사진 1. 뉴욕 차이나타운의 린쩌쉬 동상
자신이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될지 린쩌쉬로서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미국의 중국인(화인과 화교 포함)입장에서 보면 린쩌쉬의 ‘금독(아편과의 전쟁)’이 영국을 자극해 전쟁이 일어난 덕분에 난징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은 원치 않는 개방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해외로의 급격한 인구이동이 진행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국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이동하는 사람들의 흐름에는 오랜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바닷물 닿는 곳마다 중국인이 있다”고 할 정도의 대규모 인구이동은 역시 난징조약이 체결된 1842년 이후의 일이다.
미국 이민은 1848년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새크라멘토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러쉬’를 이어 1860년대 대륙횡단철도 공사로 일자리 수요가 폭증하면서 상승곡선을 그렸다. 1860년대(1861~1866)에 해외로 나간 중국의 노동자(화공) 중 샌프란시스코로 간 자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영국령 말레이 반도였다. 흑인노예제도 폐지 이후 부족해진 일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1870년대 미국의 일시적 불황 및 중국인 노동자와 경쟁관계에 있던 아일랜드인의 박해를 거친 뒤 1882년 ‘중국인(노동자)배척법안’(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되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통계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는데 1849년 325명으로 집계된 미 서부의 중국인은 1851년 2716명으로 증가했고 1882년에는 이미 10만명을 넘어서지만 이때를 정점으로 1930년에는 75,000명으로 감소했다.
해외로 나간 중국인 노동자의 행정 용어는 ‘화공’이지만 1870년대까지는 주로 ‘쿨리(한자로 苦力)’ 또는 ‘저자(猪仔)’라고 불린 데서 그들의 처우가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저자’란 초기 미국이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광둥성에서 쿨리를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말 그대로 ‘돼지새끼’이다. 변발한 머리가 돼지같다고 해서 혹은 그들이 내는 소리가 돼지같다고 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돼지새끼처럼 거래된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인 듯하다.
대부분 파산한 농민 출신이었던 그들은 배삯과 초기 정착금 등을 빚진 상태에서 3~5년의 계약을 체결해서 출발했다. ‘바다를 떠다니는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빽빽하고 비위생적인 상태의 증기선을 타고 홍콩을 출발한 그들은 생존확률 40~50%의 항해 끝에 1850년대에는 금광에서 그리고 1860년대에는 대륙횡단철도의 노동자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과 싸우며 일했다.
사진 2. 미서부의 중국 철도노동자 사진과 밀랍인형.
샌프란시스코 근처 오클랜드 박물관에서
대부분 미혼이었고, 기혼이라 해도 고향에 아내를 두고 온 중국의 노동자들에게는 가혹한 노동조건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이 성적 욕구였다. 20세기 들어 점차 완화되지만 이민 초기 미국에서 중국인 성비는 통계가 시작된 1860년 기준, 남성 33,149명, 여성 1,784명으로 남성 1858명에 여성 한 명이라는 극심한 불균형 상태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직업 매춘부가 적지 않았지만 모두 백인이었고, 중국인은 백인여성과 성관계가 금지되어 있었다.
백인의 절반을 받고도 묵묵히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를 붙들어 두기 위해 이민 당국은 가급적 결혼을 한 뒤에 아내와 함께 입국하도록 하고 그 경우 여러 가지 혜택도 부여했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관념으로 인해 며느리는 고향에 남아 시부모를 봉양해야지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이에 고안해낸 것이 바로 중국에서 여성을 사 오는 것이었다. ‘저자’의 파트너라는 의미에서 ‘저화(猪花)’로 불렸던 그들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가면 황금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말에 속아서 오거나 전문 인신매매단에 의해 납치당해 왔다. 부모에 의해 팔아넘겨진 소녀도 많았다. 미국은 1870년대까지 ‘저화’가 가장 많았던 나라였다
저화가 본격 유입되기 전인 184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최초의 매춘을 개시한 여성이 있었다. 아토이(Ah Toy, 한자로 阿彩로 표기. 1829~1928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녀는 남편(위장인 듯하다)과 함께 홍콩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던 항해 도중 남편이 사망하자 선장의 정부가 되어 무사히 미국에 도착했다. 아토이는 아직까지 중국여성이 거의 없었던(1851년에도 7명) 샌프란시스코에 기원을 개설했다. 전족을 했고 큰 키에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아토이의 소식은 주위의 금광에 전해졌다. 욕망에 굶주린 중국노동자들은 희미한 유리벽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16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큰 돈을 거머쥔 그녀는 호화로운 기원을 꾸미고 홍콩에서 어린 소녀들을 사들여 매춘에 종사시키는 ‘저화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녀에게 미국은 샌프란시스코를 중국인이 부르는 명칭처럼 금산(mountain of gold)이었던 것이다.
노예제도를 배제한 역사와 정신을 갖는 미국은 인신매매에 기초한 중국인의 매매춘을 강력히 단속했다. 1870년부터는 중국인 쿨리와 저화의 미국 진입을 저지했고, 1875년에는 국회에서 매음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의 입국을 명확히 금지했다. 1880년대 이후로는 저자도 저화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음성적인 매춘은 이어졌고 이 때문에 더욱더 입국심사를 강화했다. 중국인은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여성들도 거기에서 매춘뿐 아니라 노동자로 돈을 벌었다. 미국에서 저화의 전성시대는 1850년대부터 약 25년간 이어진 것이다.
왕아수는 1922년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이때가 되면 더 이상 ‘저화’라는 이름의 매춘여성은 없었고, 성비 격차도 크게 줄었다. 1870년까지만 해도 이곳 여성 70% 이상이 매춘업 종사자였지만 1910년에는 7%로 떨어졌다. 남편을 따라 이민 온 여성도 많아지며 직업도 소매업, 식품, 농장, 세탁, 복장 등으로 다각화했다. 또 1890년만 해도 남자 2,100명에 여자 한 명이었던 것이 1920년에는 695명에 한 명 꼴이 되었다.
사진 3. 초기의 중국 이민 여성
부두 노동자의 딸이었던 아수는 미국에 가면 하루 7~8달러를 벌 수 있다는 남자에게 속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결혼하겠다던 그 남자는 아소를 500달러에 기원으로 팔아넘겼다. 그 후로도 남자는 계속해서 아소의 돈을 갈취했고 아소의 빚은 2,500달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장로회 포도단의 도움을 받아 친구의 딸을 구제했다. 기독교에 귀의한 그녀는 애틀란타주에서 장사를 하는 한 중국인 기독교도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아토이와 왕아수의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고 운이 좋은 경우이다. 전자는 남성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제물로 삼았고 후자는 기독교 단체의 도움을 받아 지옥을 탈출했다. 1882년 미국의 중국인배척법안은 이후 여러 차례 연기되어 중국인의 아메리칸 드림을 막았다. 그 후 중국이 연합국의 일원이 되면서 이 법안은 폐기되었고 1965년의 이민법 개정(나라별 퀴터 제한 폐지) 이후에는 주로 타이완과 홍콩에서, 그리고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로는 중국대륙에서 수많은 중국인이 미국으로 건너 갔다. 중국인 성비도 역전되어 2010년 기준 시민권자 중 여성이 51.8%로 더 많다. 70% 이상이 매춘업에 종사했던 19세기와 달리 현재는 관리직 및 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가장 많다. 저화도 전문직 종사자도 중국의 이민여성을 소재로 한 소설 『여전사』(맥신 홍 킹스턴 지음)처럼 모두가 ‘여전사’였다.
천성림_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연구교수
* 참고문헌
可兒弘明, 『近代中國の苦力と猪花』, 東京:岩波書店, 1979.
李小江 주편, 『讓女人自己說話:文化尋蹤』, 北京:三聯書店, 2003.
陳翰笙, 『華工出國史料滙編 』1~6, 北京:中華書局, 1981~84.
천성림, 「근대중국의 빈곤여성-‘저화’를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2014. 6.
천성림, 「근대 중국인의 해외 인구이동」, 이혜령·김봉중 외, 『근대화와 동서양』, 한국방송통신대학출판부, 2017.
Ling, Huping, Surviving on the gold mountain:a history of Chinese American, Albany: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필자 촬영
사진 2. 필자 촬영
사진 3. 오클랜드 박물관에서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