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도시 가운데 수도의 외항으로 존재하는 도시가 다수 존재한다. 중국 수도 베이징의 외항인 텐진, 일본 수도 도쿄의 외항인 요코하마, 한국의 수도 서울의 외항인 인천 그리고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하이퐁이 그러한 도시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요코하마, 인천, 하이퐁은 근대 개항 시기부터 화교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되어 차이나타운으로 발전해 간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인천과 베트남 차이나타운은 전쟁으로 인해 차이나타운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인천차이나타운은 1950년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인천차이나타운의 상징적인 건물로 3층 벽돌 건물인 산동동향회관이 포격으로 인해 소실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런데 하이퐁의 차이나타운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베트남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일본군이 베트남을 실질 점령통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의 항복은 권력의 공백 사태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1945년 7월 개최된 포츠담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은 베트남 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이북에는 중화민국 군대(이하 중국군)가, 이남에는 영국군이 점령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중국군은 8월 24일 루한(盧漢)을 사령관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부에 진주했으며, 영국군은 9월 6일 남부 사이공으로 진주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1945년 8월 24일 협정을 맺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자, 프랑스군은 남부 주둔 영국군을 점차 대체, 1946년 1월 말에는 남부 전 지역을 장악했다.
그림 1. 일본인 화가 안도 슈이치가 그린 1940년의 하이퐁 공원
중화민국과 프랑스는 1946년 2월 28일 충칭에서 협정을 체결하고, 북부 주둔 중국군의 철수를 약속, 1946년 3월 1일부터 철수를 개시했다. 중국군의 철수가 완전히 이뤄진 것은 9월 18일로 이날 중국군 67사 제3단이 하이퐁에서 중국으로 철수했다. 이와 같은 중국군의 철수는 제2차 국공내전의 발발로 베트남에 계속 주둔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뤄졌다. 중화민국은 중국군 철수와 동시에 북부에 프랑스군의 주둔을 인정했다.
이러한 영국 및 프랑스, 중화민국의 군사적 개입이 이뤄진 가운데, 베트남 국내는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북부와 남부 일부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해, 완전히 독립된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이러한 베트민의 목표는 프랑스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양측은 여러 차례 다양한 교섭을 한 끝에, 1946년 3월 6일 프랑스가 베트남공화국을 인정하는 대신, 베트민은 북부에 프랑스군 15,000명의 주둔을 허용했다. 이로써 베트남 북부에 프랑스군이 주둔하게 됐다.
1946년 4월 이후 프랑스군은 북부에서 중월국경의 남부지역과 연해지역을 공격하면서 베트민군과의 군사충돌이 발생했다. 양측은 평화 달성을 위한 교섭을 이어갔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11월 20일 프랑스 초계정이 하이퐁에 입항한 중국 선박을 나포하자, 베트민군이 프랑스 선박에 사격을 가해 총격전이 벌어졌다. 12월 19일에는 프랑스군이 하노이로 진공하자, 베트민군이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1월 20일 하이퐁에서 벌어진 양측의 군사적 충돌은 27일까지 주야로 이어졌다. 하이퐁은 베트남 북부의 최대 항구 도시이자 최대 공업도시였다. 하이퐁의 화교 인구는 1931년에 1만9,000명으로 도시 전체 인구 12만4,000명의 6.5%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당시 베트남 거주 화교 26만7,000명 가운데 쩌런 6만6,000명(24.7%), 사이공 3만4,000명(12.7%)에 이어 3번째(7%)로 화교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하이퐁 화교는 정미업, 피혁공장, 기계공장, 선박조립공장, 그리고 상업부문에서 베트남인을 압도하고 있었고, 프랑스인 다음의 경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현재의 리트잉끼엣 거리와 그 뒤편의 땀박강 연안을 중심으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의 화가인 안도 시로이치(安東收一)가 1940년경 하이퐁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하이퐁의 화교는 하노이의 그들보다도 훨씬 결정적으로 베트남인을 압도하고 있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베트남인의 20%에 불과하지만, 그 경제적 세력은 뿌리 깊은 것으로 베트남 농민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미곡 거래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진 2. 1940년대 초반 하이퐁항의 부두
바로 이러한 화교의 도시 하이퐁에 양측의 군사적 교전이 격렬하게 벌어졌으니 화교에게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23일 하이퐁의 프랑스군 사령관은 상기의 차이나타운 내에서 베트민군이 2시간 내에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베트민군이 차이나타운에 주둔한 이유는 베트남인 거주자의 피해를 줄이고, 화교 및 중화민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베트민군이 최후통첩을 수용하지 않자 프랑스군 함대는 하이퐁 시내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과 양측의 교전은 베트남인뿐 아니라 하이퐁 화교에게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1946년 12월 31일 현재 하이퐁 화교의 피해는 가옥 전부 파손 33칸, 부분 파손 178칸, 실종 544명, 체포 242명, 부상 53명, 사망 61명에 달했다. 하이퐁화교선후위원회(海防華僑善後委員會)는 당시의 피해 상황을 “조국 8년 항전 중에도 하이퐁 동포가 입은 손실도 이처럼 엄중하지 않았다. 민족 신경(神經)의 보위(保衛) 전쟁(주: 중일전쟁)에서도 동포가 입은 고통과 사상, 가옥의 소실, 재산의 약탈은 이러하지 않았다. 거주지인 베트남에서 양 민족 간의 적대적 교전 과정에서 입은 피해다.”고 표현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6】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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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鴻瑜, 『越南史 史記槪要』, 臺灣商務, 2018.
克里斯多佛·高夏(Christopher Goscha) 著, 譚天一 譯, 『越南: 世界史的失語者』, 聯經, 2018,
安東收一, 『佛印-繪と文』, 大日本出版株式會社, 1941.
逸見重雄, 『佛領印度支那硏究』, 日本評論社, 1941.
Victor Purcell, The Chinese in Southeast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安東收一, 『佛印-繪と文』, 大日本出版株式會社, 1941.p21
사진 2. 逸見重雄, 『佛領印度支那硏究』, 日本評論社, 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