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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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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화교 자본가는 혁명에 관심이 없다? _ 김종호

동남아시아 화상(華商)들의 이익추구 본성, 그 와중에 관찰되는 친제국주의적 성향, 기회주의적 태도는 청말과 중화민국 시기 대륙의 지식인들에게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11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혁명 조직들이 광저우와 해외 여러 거점을 중심으로 청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설립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화상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도,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은 화상 거부들도 많았다. 이들은 20세기 전체에 걸쳐, 혹은 후대의 민족주의적 사학자들에 의해서, 혹은 정치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비판을 받게 되는데, 신해혁명의 주역이면서 이후 국민정부 내에서 장제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는 정치인이자 혁명가인 후한민(胡漢民)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는 혁명에 적극적이면서, 조국에 대한 갸륵한 마음이 남아있는 이들은 중소상인이나 일반 노동자들이라며, 거대 자본을 가진 자본가들을 혁명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장사치로 폄하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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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후한민 사진

 

반대로 화상들은 그들을 아무런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리면서도 대가에 대한 아무런 약속이나 보장도 없이 오직 애국심에 기대어 돈을 달라고 징징거리기만 하는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1930년대 일본에 의한 중국대륙 침략이 본격화되고, 전국에 국화(國貨)운동이 펼쳐지면서 일본 상인들과 거래 관계를 유지하는 화교 상인들이 모두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때조차 많은 화교 상인들은 그 거래를 쉽게 깨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미 이 시기 이주민으로 초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고 이를 영토 삼아 살아가던 화교 상인들과 대륙의 민족주의 기반 지식인들 사이에는 조금씩 균열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이후 냉전의 시작과 함께 그 간극은 더욱 넓어졌고, 1955년 반둥회의로 완전 갈라지게 된다.

 

아래는 후한민의 불만을 기록한 글도 이러한 간극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10. 난양의 자본가는 혁명을 하지 않는다.


화교들은 혁명에 매우 열성인데, 대개 외국인의 핍박을 받아 조국에 대한 관념이 비교적 절실하기 때문이다. 화교들 가운데 주관이 있는 이들은 언제나 중국을 하나의 어엿한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 바, 그들은 대외교제에 있어서도 훌륭하게 역할을 해낸다. 화교들의 혁명에 대한 태도를 분석하자면,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대자본가이고, 다른 하나는 열성이 풍부한 일반 노동자, 소상인인 화교들이다. 이 두 종류의 화교들의 혁명에 대한 태도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대자본가들은 가장 혁명을 하지 않고, 가장 혁명을 두려워하는데, 거대자본가라는 사람들은 모두 고유의 자본을 지킴과 동시에 확대하려는 경향을 고수하면서 혁명을 마치 그들에게 크게 불리한 것처럼 여긴다. 내가 지금 두 명을 예로 들어 볼 것인데, 기타 화교 자본가들의 태도를 대표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한 명은 야오동셩(姚東生)으로 그의 형제는 일찍이 황화강(黃花崗) 혁명(역주: 1911년 광저우에서 쑨원의 동맹회가 일으킨 제3차 혁명운동을 가리킴)으로 희생하였다. (그러니) 그 자신 또한 우리의 동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후에 주석 광산을 열었고, 큰 재물을 모아 결국 일약 자본가가 되었다. 우리는 그가 혁명에 대해 결코 모른 체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고, 반드시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찾아가 혁명에 도움을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일개 자본가의 표정을 보이고는 말하였다!

 

지금 나의 재산이 중대하게 되어 종전과는 다르니,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자네들과 일을 도모하자고 하는 것은 안 될 일일세! 자네들이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세나! 앞으로 천천히 방법을 세워보자고!”

 

이러한 말은 실로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으로 황금의 마력이 결국 한 개인의 사상을 바꿔놓는 것이 어찌 이토록 빠르단 말인가!

다른 한 명은 성이 루()인 자로, 실로 더욱 나쁘다고 할 수 있다! 329일 광저우 황화강 혁명 전에 난양(南洋 동남아시아)의 동지들로부터 조달할 자금을 모집하면서 그가 고무농장사업으로 재산이 2-3만 위안에서 40만 위안 정도로 급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덩쩌루(鄧澤如) 동지는 이러한 신흥 부자(暴發戶, 역주: 벼락부자를 의미하는 Parvenu의 중국어 음역)들에게 반드시 가르침을 청해야 한다고 여겨, 나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갔다. 우리는 그와 세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고, 그야말로 입이 닳도록 말을 하였다. 쩌루는 이번에는 이전 몇 차례에 비해 움직이는 군사가 달라 그렇게 큰 손실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상인 루)는 모금 장부를 받고는 바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쓰더니, 다 쓰고 난 이후 장부를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읍()하고는 미안한 어투로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가 이렇게 미안해하는 것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장부를 펴서 보지 못하고, 문을 나온 뒤에 살펴보니, 역시나 20위안()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쩌루가 펄쩍 뛰며 말하길,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세 시간을 보내고도 20위안만을 쓰다니! 만약 세 시간을 가지고 보통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결코 이렇지는 않을 걸세!”

 

이상 예로 든 두 명의 신흥부자들조차 우리의 혁명을 도우려 하지 않았으니, 우리의 혁명을 반대한 대자본가들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자본가들의 태도는 금전에 대해서는 먹어도 부족함을 모르고, 돈이 쌓이면 쌓일수록 많아지니, 그들이 돈을 보관하는 철로 된 금고는 불에도 타지 않는다. 예를 들어 920위안이 있으면, 그들은 반드시 수십 위안을 빌려서 기어코 일천 위안을 만들어 놓고는 기뻐한다. 만일 그들이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들의 금고 속 일천 위안으로 보전하겠는가? 그들은 매우 마음 아파하며 섭섭해할 것이다! 하물며 일천 위안을 채워도 일천 오백 위안, 이천 위안을 모으려 할 것이니, 그들은 영원히 다른 이에게 돈을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화교 대자본가들의 태도 역시 이와 같다.

요루요(有陸祐)란 자는 난양 영국령에 있는 대자본가인데, 그는 쿨리 출신으로 후에 쿨리 모집객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사업상) 수차례 실패하였지만, 후에는 결국 다시 부활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재산만 4, 5천 만에 달했다. 그는 원래 우리 혁명당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한 푼의 돈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여러 사정으로 쩌루를 찾아 도움을 청한 바 있고, 쩌루 역시 진실로 고심하여 그의 여러 사정을 처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쩌루가 그에게 저는 당신이 중국의 혁명사업을 도와주기를 바랍니다!”라고 청하자, 그가 답하길, “기회가 있을 때를 기다려 다시 말하시지요. 기회가 있으면 제가 다시 도울 방도를 마련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매번 혁명을 할 때마다 쩌루는 그를 찾았지만, 그는 언제나 당신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 때 제가 돕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난양이라고 불리던 동남아시아 화교사회에서 대자본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오랜 기간 동남아시아 지역에 정착하여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이미 기득권이 되어 있던 2세대, 3세대 기업가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이미 동남아시아에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대부터 자리 잡고 있었고, 수많은 중국계 쿨리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착취함으로써 악명이 높은 이들도 많았다. 20세기 초 중국인 이민이 절정에 달하게 되면서 많은 신이민자들(토톡 혹은 싱커로 불리던)이 이들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고, 단체로 저항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이주지역에서 동족끼리 계급갈등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계급갈등이 신이민자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 종류는 대륙 출신이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으로 대박이 나 벼락부자가 된 이들인데, 위의 글에서 후한민이 말한 소위 폭발호(暴發戶)’가 그들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남아시아에서 벼락부자가 된 이들은 주로 고무농장, 주석광산을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운영하면서 대박이 난 이들이다. 이 시기 유럽과 미국에서 자전거와 자동차가 상용화되면서 고무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였고, 장기보관 가능한 파인애플 통조림이 대량 생산되면서 캔에 쓰인 주석의 수요 역시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세계시장에서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에서 대량재배 및 채굴되던 두 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이 대농장과 광산을 주로 중국계 상인들이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권리를 획득하여 독점 운영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급격히 거부가 된 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후한민이 주로 찾은 이들은 바로 이렇게 거부가 된 이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몇몇 대화들을 보면 급진적 혁명가와 확실한 성공보장을 추구하는 기업인 사이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듯해 흥미롭다. 당시 대의를 품고 공화국을 꿈꾸던 혁명가들의 눈에 난양의 화상들은 얼마나 기회주의적으로 보였을지, 기업가로서 난양의 화상들은 대륙의 멋모르는 혁명가들의 요구가 얼마나 어이없었을지,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빼고 보면 확실히 정치인과 기업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와 같은 관계는 사실 이 시기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정치인과 기업인의 관계에도 그대로 투영할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그렇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6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참고문헌

胡漢民, 南洋與中國革命, 張永福 編輯, 南洋與創立民國, 上海中華書局, 1933(民國22)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 출처는 다음과 같음 

위키미디어 커먼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hm.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