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76년 6월29일 청(淸)나라 황제 동치제(同治帝)는 "앞으로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는 폐하고 국궁(鞠躬)으로 대신한다"고 선포했다. '삼궤구고'란 청나라 황제를 알현할 때 드려야 하는 인사법으로,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이마를 바닥에 대고 두드리는' 인사법이었다. 한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바닥에 대고 조아려야 하는 이 인사법은 당시 베이징(北京)에 와있던 서양 외교관과 상인들 사이에 원성이 높았다. "너무나 굴욕적이니 허리만 가볍게 굽혀서 인사하는 국궁으로 하게 해 달라"는 것이 서양 외교관들의 요청이었다. 1840년부터 두 차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 패해 나라가 서양 열강의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던 청 왕조로서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876년 청 왕조는 처음으로 영국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했다. 그 동안 "천하의 중심에 중국이 있고, 중국의 주변 사해(四海)에, 이른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는 네 오랑캐가 산다"는 중국의 천하관(天下觀)에 따라 사방에서 오는 외교관을 받아들이되, 천하의 중심에 있는 중국은 외국으로 외교관을 파견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국의 천하관이 삼궤구고의 예를 폐지하면서 자신들도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변화를 겪게 된 것이었다.
중국이 삼궤구고를 폐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선언한 것보다 228년 전에 유럽에서는 개신교와 로만 가톨릭간의 30년 전쟁이 끝나면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은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며, 주권은 불가침의 것'이라는 국제법의 원칙을 확립한 베스트팔렌(Westphalia) 조약에 따른 국제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청나라가 이른바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른 국제사회에 편입된 것은 청일전쟁에 패한 후 1911년 왕조가 멸망하기 35년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12일에 있었던 헤이그 중재재판소의 필리핀과 중국 간 남중국해 영토분쟁에 관한 판결에 대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포하는 모습에서는 과거 청나라 황제들이 "나를 알현하려면 삼궤구고의 예를 갖추라"고 고집하던 모습이 비쳐보였다. 시진핑은 "(중재 재판소가 어떤 판결을 내렸든) 남중국해의 섬들은 자고이래(自古以來ㆍ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이며,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토주권과 해양권익은 이른바 필리핀이 제기한 남중국해 중재안의 영향을 어떤 상황에서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중국은 해당 중재안에 기반을 둔 어떤 주장과 행동도 접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필리핀과 중국 사이에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필리핀에서는 '스카보로우 아일랜드(Scarborough Island)', 중국에서는 황옌다오(黃岩島)라고 부르는 산호초다. 이 산호초가 중국측이 주장하는 ‘남해구단선(南海九斷線)’이 인정될 경우 중국 영해 내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고, 필리핀이 주장하는 영유권이 인정될 경우 필리핀의 영해 내에 위치하게 될 것이었다. 필리핀의 제소로 열린 유엔해양법약에 따른 국제중재재판소가 12일 "남해구단선 내 수역과 자원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필리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림 1 남해구단선(南海九斷線)
남중국해의 지도를 펴놓고 남해구단선을 한번 들여다보자. 베트남 앞바다와 말레이시아 북부 해역, 그리고 필리핀 서부해역에 아주 좁다란 해역만 남겨놓고, 중국이 그어놓은 9개의 줄로 이루어진 남해구단선이 보일 것이다. 이 남해구단선 안쪽, 거의 인도 크기와 맞먹는 해역을 아홉 개의 선으로 구획해놓고, "이 해역은 우리 중국이 한(漢)나라 때부터 관리해왔다", "명나라 정화(鄭和) 장군이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갈 때 필리핀 루손도의 총독을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ㆍ청 때는 중국 어민들이 이곳에서 어로행위를 해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중재재판소는 이런 중국의 주장에 대해 "남해구단선내 수역과 자원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사상 최초로 내린 것이다.
1876년 청의 동치제가 삼궤구고의 예를 폐지하고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 상주 외교관을 보내기 시작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편입된 중국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강대국임을 자처하던 주장과는 달리 "국제중재재판소의 판결을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하고 있는 모습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외치던 전통적인 중국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 내에서 가장 지적(知的)인 외교관이라고 평가받는 푸잉(傅英) 전 영국대사 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외사위원회 주임마저도 포린 팔러시(Foreign Policy) 최근호 기고를 통해 "국제 중재재판소의 결론을 접수하지도, 참여하지도, 승인할 수도, 집행할 수도 없다"고 선포했다. 그녀의 논리는 "중국은 주권국가의 일원이며, 분쟁 해결의 수단은 자신에게 편리한 해결방안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채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국제법이 우리에게 부여한 합법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중국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공생해야 할 해역에 남해구단선이라는 광범위한 선을 그어놓고 "이 안은 다 우리 바다"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중국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의 무기체제의 배치와는 상관없이 한국의 사드(THAAD) 배치에 대해 "절대로 안 된다"고 오지랖 넓게 우기고 있는 모습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승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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