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근대 조선화상 화취공의 경영활동-『조업사적책』을 근거로-」, 『동양사학연구』152집, 2020.9.30., 507-544쪽
이 논문은 화교 양건민이 쓴 비망록 『조업사적책』을 통해 산동성 양마도 출신 양씨 일가의 근대 조선 이주와 화취공의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한 경영활동을 분석한 것이다. 검토 결과 새로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화취공은 1903년 인천 청국조계 내에 꽤 규모가 큰 주단포목상점 유성잔으로 산동성 상업자본에 의해 합과로 설립됐다. 자본출자자인 동가 사이의 사정으로 인해 유성잔이 휴업을 하고,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화취공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양익지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화취공의 경영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고, 1930년대에 들어 확실한 경영주가 되었다. 화취공은 1933년 경영 위기를 맞이하여 상호명을 화취창으로 바꾸고, 양익지의 자본이 화취창 전체 자본의 8할을 차지하는 명실상부한 양익지 일가 주도의 주단포목상점이 되었다. 화취공은 상하이에서 직물을 수입하여, 전국의 화상 주단포목도매상점과 소매상점을 통해 판매, 조선화상을 대표하는 주단포목상점으로 발전했다.
화취공은 1931년 조선화교배척사건 직후 발생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지만, 풍부한 부동산 보유와 인천 화상에 대한 주식 투자를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리고 화취공은 주단포목의 영업이 조선에서 한계에 직면한 것을 인식하고, 만주 투자에서 활로를 찾았다. 화취공은 하얼빈에 화취공유방을 설립하여 두병 등의 대두제품을 생산했다. 화취공은 이 공장 경영을 위해 상당한 자본을 투입하고, 양익지의 장남인 양건민을 파견, 경영의 주축을 인천에서 하얼빈으로 옮겼다. 또한 양익지의 차남인 양자평이 봉천 영미연공사의 직원으로 일한 것을 계기로 담배 특약점인 태풍호를 설립,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양자평이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다, 1936년 처형된 것을 계기로 태풍호는 태동양행에 넘어갔다.
중일전쟁 시기 주단포목상점 화취창은 점원수와 연간판매액 부문에서 후발 상점에 역전을 당했을 뿐 아니라 이전에 비해 경영활동이 약화되었다. 여기에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경제통제와 직물 배급제 실시로 인해 화취창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화취창 점원이 항일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화취창의 상업활동은 더욱 제한되어, 결국 1943년 문을 닫았다. 화취공유방은 일본의 항복 이후 하얼빈이 소련군, 중국국민당군, 중국공산당군에 의해 연이어 점령당하는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 이로써 인천에서 1903년 시작된 화취공의 40여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상의 검토에 의해, 인천 화취공은 산동성의 양마도 및 옌타이, 상하이, 봉천, 하얼빈을 거점으로 하는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광동방 화상 동순태가 상하이, 홍콩, 요코하마, 만주 등지를 거점으로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한 경영활동을 펼친 것은 밝혀졌지만, 산동방 조선화상도 그러한 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화취공은 근대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마찰과 전쟁으로 인한 각종 경제활동의 제약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그것은 화취공만이 아닌 조선화상 전체의 운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