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 거주 화교를 관리 및 통제하는데 직접적인 방법을 취했다. 경찰 당국이 화교의 입출국, 노동 허가, 동태 파악 등의 업무를 직접 관장했다. 각 지역에 화교사회를 총괄하는 자치적인 상회(商會) 조직이 있었지만, 경찰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단체는 아니었을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어떠한 책임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림 1. 종교 벽화에 ‘博愛公平’이라 쓰고 있는 프랑스인과 화교
이에 비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 당국은 베트남화교를 방장(幇長)이라는 독특한 제도로 간접통치를 했다. ‘방’은 동향단체의 방회(幇會)를 말하는 것으로 방장은 방회의 수장을 말한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방장을 직접 임명하고 방장에게 다양한 행정권과 책임을 부여했다. 방장제도의 기본은 이러했다.
첫째, 인도차이나 거주 화교는 반드시 5개의 방회 가운데 한 곳에 가입해야 했다. 방장제도는 프랑스 식민 당국이 처음으로 고안하여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의 구엔(阮) 왕조는 화교사회를 간접 통치하는 방법으로 이미 방회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베트남화교의 집단 거주지인 사이공과 쩌런에는 적관(籍貫)과 방언을 기준으로 칠부(七府)의 방회가 개설되어 있었다. 칠부는 복건성의 복주부(福州府), 장주부(漳州府), 천주부(泉州府), 조주부(潮州府), 광동성의 광주부(廣州府), 경주부(瓊州府), 그리고 절강성의 휘주부(徽州府, 나중에 영파부(寧波府)로 바뀜)였다. 이들 칠부의 각 방회는 1807년 연합조직인 칠부공소(七府公所)를 설립했으며, 1820년에는 공소의 회관인 칠부문묘(七府文廟)가 건축되었는데, 그 책임자를 마수(禡首)라 불렀다.
사진 2. 하노이시 프랑스 총독 관저
프랑스 식민 당국은 1871년 칠부체제를 칠방(七幇)체제로 개조했다. 장주부와 천주부를 복건방에 편입시키고, 경주부에서 해남방을 분리시켰다. 휘주부를 철폐하고, 복건성과 광동성 이외 출신 화교는 객가방(客家幇)에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칠방은 광필(광주)방, 조주방, 복건방, 복주방, 객가방, 해남방, 경주방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1885년 다시 한번 방회 조직을 개조했다. 복주방을 복건방에, 경주방을 해남방에 각각 편입시켜, 기존의 칠방체제에서 오방(五幇)체제로 전환됐다. 오방은 광필방, 복건방, 조주방, 해남방, 객가방이다. 개편 당시 최대의 방회는 광동방과 복건방이었다. 오방체제 확립 후 프랑스 식민 당국은 광동방, 복건방, 조주방, 객가방의 사방협회(四幇協會)라는 방회의 연합단체 설립을 허가했으며, 선거로 이사장을 선임했다. 1927년에 명칭은 화인협회(華人協會)로 바뀌었다. 구엔 왕조 시기의 칠부공소와 같은 연합 방회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오방체제는 기본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지속됐다.
둘째, 방장과 부방장(副幇長)은 방원(幇員)의 선거로 선출되고, 프랑스 식민정부의 부총통(副總統)에 의해 임명되었다. 방장 및 부방장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이 가능했다.
셋째, 방장은 프랑스 식민 당국의 모든 지시를 따라야 했으며, 방회의 개인 회원과 집단 회원에 당국 지시를 전달하는 중개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식민 당국의 경찰관 및 촌의 유력자와 협력하여 방회 회원의 각종 경찰 관련 위반 업무를 처리했다.
넷째, 방장은 소속 방회의 이민자가 입국할 때 해당 이민의 담보 책임을 져야 했다. 만약, 방장이 해당 이민의 담보를 거절하면 해당자는 입국이 허가되지 않았다.
다섯째, 방장은 반드시 중국어와 프랑스어로 된 방원의 명부, 납세기록, 호구변동 등 소속 방원과 관련된 모든 행정사무를 3개월마다 이민국 국장과 행정청에 보고하여, 심사를 받아야 했다. 식민 당국이 화교에게 부과하는 각종 세금의 징수와 방비(幇費) 청구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방장은 소속 방원에 대한 막강한 행정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 당국이 방장제도를 통해 화교사회를 ‘이교제교(以僑制僑)’라는 간접통치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방장제도의 실시는 각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베트남화교의 약 8할이 거주하는 남부지역(코친차이나)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직할 통치하는 지역이어서 방장제도가 가장 철저하게 지켜졌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북부지역의 통킹(東京), 중부지역의 안남(安南)에선 방장제도 적용이 조금 달랐다.
통킹은 하나의 지방 또는 하나의 도시에 그 지역 내 화교 전부를 일괄하여 하나의 방회에 소속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다만 농장, 광산, 공장에서 노동하는 화농 및 화공은 각 방회에 가입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특별한 단체의 설치를 허가했다. 방장 및 부방장의 임명은 코친차이나와 같았으며, 임기도 같은 2년이었다. 안남은 화교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통킹과 마찬가지로 오방체제를 구성할 수 없는 지역이어서 하나의 방회에 통합하여 편입시켰다. 통킹에선 방장의 임기 제한이 없었으며, 방원이 방장선거를 거부하면 식민 당국이 직접 임명할 수 있었다.
방장제도는 1946년 중화민국과 프랑스 간의 협정 체결 때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베트남화교 가운데서는 방장제도를 식민 당국의 ‘주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1948년 중화이사회(中華理事會), 각 방회의 회관 및 공소는 중화이사회관(中華理事會館), 방장은 이사장(理事長)으로 개칭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방회와 방장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5】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逸見重雄(1941), 『佛領印度支那硏究』, 日本評論社.
太平洋協會編(1940), 『佛領印度支那:政治·經濟』, 河出書房.
Lynn Pan general editor(1999), The Encyclopedia of the Chinese Overseas, Harvard University Press
이정희(2018), 『한반도화교사』, 동아시아.
Nguyen Thi Thanh Ha(2017), 「ベトナムにおける‘明鄕’の家譜と社會組織に關する人類學的硏究」, 廣島大學博士學位論文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Lynn Pan general editor(1999), 231쪽
사진2. 逸見重雄(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