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로에서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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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의 또 다른 전장(戰場): WTO와 국제질서 _ 신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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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5WTO 분쟁해결기구 패널심(1)은 미국이 2018년 중국산 제품에 부과한 2,340억 달러 규모의 관세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 중국에 부과된 관세에 대한 첫 판결로서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었다. 본 판결 당사자인 중국과 미국은 상반된 입장을 내놓았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즉각 성명을 내고 WTO가 중국의 해로운 기술 관행을 막기에 부적절하며, 중국이 WTO를 이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중국 상무부는 성명을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결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고, WTO를 핵심으로 하는 다자무역 체제는 국제무역의 초석이므로 미국 역시 이 같은 다자무역체제를 존중하길 바란다는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WTO 분쟁해결절차는 2심제로 1심 패소국의 항소여부에 따라 최종심인 2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현재 최종심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의 위원 임명을 미국이 거부하고 있어 지난해부터 그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결국 이번 판결이 2심에서 무기한 계류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의 서류상 승리(paper victory)’라는 평가는 상소기구를 무력화시킨 미국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질서 준수와 국제기구에서의 역할을 놓고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극명하게 바뀐 것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개발도상국 지위를 어필하면서 국제질서에서의 우대조치를 주장하던 중국은 현재 차별 없는 다자주의와 WTO 규범 준수를 강조하면서 미국에게 국제질서를 통한 문제해결을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미국은 WTO가 중국을 우대하고 상대적으로 미국은 차별하여 큰 손해를 입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공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WTO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파리기후협정, 유네스코 등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다자협의체에서 탈퇴했으며, 최근에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코로나19 대응 미흡과 중국 편향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지원금 삭감을 언급해 WHO와 날을 세우기도 했다.

 

국제법(또는 질서)과 국제관계에 대한 많은 학계의 논의가 있지만, 최근 미중갈등의 쟁점 중 하나인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과 법의 역할을 분석하는 것으로 법사회학적 입장이 있다. 막스 베버나 에밀 뒤르케임 등으로 대표되는 고전 사회학자들은 사회현상과 법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법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산업화와 분업화 등 경제시스템의 확장이 법의 필요성을 증대시켰고, 이러한 법을 매개로 사회연대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 근대 유럽사회에서 산업자본주의 등장으로 다원화된 사회구성원 간의 연대형태가 계약 등 안정성을 담보하는 법체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재구성되었고, 이는 특정행위자의 이익이나 선호가 아닌 조약, 규범 등 장기적으로 축적된 패턴을 수렴하는 사회화 효과를 통해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에 대해 베버는 행위자의 경험을 통해 그 타당성에 대한 주관적 믿음이 형성된 규범이며, 이것이 법적 의무를 가지게 되면서 인습과 구분되는 법이 된다고 주장했다. 뒤르케임은 집합의식에 기초한 사회적 규제 즉,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에 법을 통해 계약이 강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법을 매개로 한 사회적 연대는 공통된 믿음과 가치공유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연대의 외적 표현이 법으로 표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국제질서에 적용하면, WTO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질서의 확산은 다원화된 국제사회 구성원의 행위를 일련의 레짐과 같은 시스템에 의존하여 예측가능하게 만들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장기간 학습, 내재화, 습관화하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정당성과 일관성이 확보되어 다수 국가들의 참여와 순응을 이끌어 내고, 국제사회의 연대를 강화시켜온 것이다. 법을 매개로 한 사회화는 동일한 법체계 속에 있는 구성원들 간의 정체성 공유를 가져오고, 다른 체계 속의 구성원이 이를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동기압력(peer pressure)으로 작용하여 다수의 국가가 원하는 질서로 이끄는데 있어 물질적 힘보다 더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재 트럼프 정부는 국제질서를 선택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질서의 일관성을 저해하고 스스로의 권위와 타국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인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일방적 이익만을 주장함으로써 다수의 이익을 배반하게 되거나 현 질서에 대한 불신과 공평성 문제를 대두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국제질서의 사회화 효과는 미국 스스로도 사회화의 동학에 묶여 자국의 이익만을 강조할 수 없는 구조로 변모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결국 사회적 동학을 깨는 행위는 현 국제질서에 대한 신뢰성과 당위성을 손상시키고,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미국의 권위와 정당성까지도 약화시킬 수 있다.

 

반면 중국은 장기간 학습과 내재화를 통해 내부적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축적된 패턴을 수렴하는 사회화 효과를 경험하고 있고, 현 질서에서 상당한 이익을 누리고 있으므로 향후에도 경제 분야에서 만큼은 자유주의 질서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국제질서는 중국이 이해당사국들에게 미국의 불합리한 조치나 행위에 대해 호소하고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소통창구이므로 더 적극적으로 준수하고 활용해야 할 동인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무부가 이번 WTO 판결 승리 후 발표한 성명은 이러한 중국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미중 갈등을 통해 미국이 중국의 시장개방과 불공정 무역관행 등을 개선하는 틀을 마련했다면 그 효과적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더 큰 질서에 중국을 편입시키는 것이다. 미국은 다자프레임 속에서 미국적 가치를 다시 세우고, 기존 글로벌 거버넌스가 유효함을 지속적으로 입증해야만 국제질서의 양극화를 막고 중국과 평화로운 경쟁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미국이 중국의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이 미중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미국이 장기적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압박을 통한 단기적 성과 달성이 아니라 이를 넘어선 장기적 질서 구축에 더 관심을 쏟는다면 미중 갈등과 주변국의 혼란이 좀 더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번 WTO 판결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많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신지연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 이 글은 다음 논문의 주요 내용을 수정·보완함.

신지연(2019), 미중 무역전쟁의 해결: 국제질서의 사회화 효과를 중심으로, 중소연구, 431.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s://www.wt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