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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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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중국계 이주민, 동화와 적응 사이 초국적 이주민 정체성 _ 김종호

영국인 선장이 지휘하고 자바인 승무원을 실은 중국 상인 소유 스쿠너(schooner)선인 일본의 장미(Kemhanrj Djepoon, Rose of Japan)’를 타고 싱가포르로부터 20여 일간의 항해 끝에 우리가 발리섬 북부에 위치한 빌레링(Bileling)의 위험한 정박지에 닻을 내린 것은 1856613일이었다. 선장, 그리고 중국인 화물감독관과 함께 상륙하면서 나는 바로 희한하면서도 흥미로운 장면을 마주하였다. 처음 우리는 중국인 반다(Bandar, 혹은 대표 상인)의 집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잘 차려입고, 모두 보란 듯이 크리스(krisses, 인도네시아산 단검)로 무장했으며 상아, 금 혹은 아름답게 조각된 나무를 과시하는 수많은 현지인들을 발견하였다.


이곳의 중국인들은 그들 고향의 의상을 모두 버리고 말레이 의복을 했는데, 그 때문인지 발리섬의 현지인들과 거의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말레이 계통임과 동시에 몽골 계통에 가까운 모습). 집 바로 옆 망고나무의 짙은 그늘 아래에는 몇몇 여성 상인들이 면 제품을 팔고 있었다. 이곳에서 여성들이 장사하고, 남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데, 사실 이는 마호메트를 믿는 말레이인(무슬림 말레이인)들은 절대 취하지 않을 관습이다. 우리에게 대접하기 위해 과일, , 납작한 빵, 사탕과자 등이 차려진 자리에서 싱가포르에서의 우리의 사업과 무역 상황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 그 이후 우리는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좀 걸었다. 이곳은 높은 진흙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들과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들 등, 매우 지루하고 적막한 곳이었는데, 우리가 방문한 몇몇 집은 매우 친절히 맞아주었다.”

 

Alfred Russel Wallace, The Malay Archipelago, London: Macmillan and Co., 1890, p. 116, ‘Bali and Lombok’ 중 발췌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자연과학자인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생태학적으로 구분하는 가상의 월리스 선(Wallace Line)’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탐험가이다. 그는 1854년에서 1862년까지 8년 동안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지역을 현지조사하는 와중에 동남아시아의 동식물과 오세아니아의 동식물이 정확히 나뉘는 지점을 발견하였고, 이를 그음으로써 두 지역을 구분하였다. 최초 이 선은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섬의 사이, 발리섬과 롬복섬의 사이를 지나고 필리핀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 생태학적으로 동남아시아는 보르네오, 자바, 발리까지고, 그 이외에 술라웨시, 롬복, 티무르, 뉴기니 지역은 오세아니아에 속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후 월리스 선은 헉슬리라는 학자에 의해 필리핀까지 오세아니아로 분류되는 방향으로 수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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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리스 선(Wallace Line)’.

지도의 붉은 선이 자연생태학적인 측면에서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구분하여 월리스가 그은 가상의 선

 

사실 8년 동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군도들의 자연을 직접 탐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 당시 식민지의 오지를 현지조사하는 제국의 학자들을 단순히 자연과학자 정도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였고, 인류학자이자 생물학자였다. 1823년생인 월리스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 동남아시아 해양지역을 탐험하였고, 8년에 걸친 탐험의 결과물이 바로 찰스 다윈도 감탄한 자연과학사의 대작 The Malay Archipelago. 이 기간동안 월리스는 125,660종의 동물과 곤충을 수집하였고, 이를 유럽의 학계에 소개 혹은 판매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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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리스의 역작,

The Malay Archipelago의 부제는

오랑우탄의 땅이자 새들의 천국, 인간과 자연을 연구하며 작성한 여행기

 사진은 10쇄에 해당하는 1890년 본의 삽화.

보르네오섬의 토착민 가운데 하나인 다약크족의 오랑우탄 사냥 모습

 

알프레드 월리스의 The Malay Archipelago는 그 부제처럼 인간과 자연을 연구하면서 작성한 여행기이기에 19세기 중반 동남아시아를 살아가는 현지의 중국인들에 대한 기록들 역시 상당하다. 앞서 발췌하여 인용한 내용은 월리스가 주요 거점으로 삼는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발리와 롬복을 탐험한 기록의 가장 첫 부분이다. 월리스가 인상깊게 여기는 것은 발리의 현지에 완벽히 동화한 중국계 이주민들의 모습이었는데, 이는 중국계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거나 혼혈그룹으로 현지화했다 하더라도 문화, 삶의 방식 등은 중화적 요소가 다분한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의 화교화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발리섬은 수 세기 동안 이슬람화한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힌두 신앙을 신봉하는 지역이다. 월리스의 기록처럼 발리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경우 자바에서 이슬람인들에 의해 배척당했던 중국인들과는 달리 매우 잘 적응하였고, 상당히 힌두화한 모습마저 관찰된다. 이는 제국주의 시기 자바 지역에서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인들에 의해 현지 토착민들을 착취하는 데 활용되었던 반면,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의 지배에 끝까지 저항한 발리의 중국계 이주민들의 경우 생존을 위해 현지에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자바 지역의 중국계 이주민들이 유럽 식민 세력이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이전인 15, 16세기에는 상당수 이슬람화하면서 현지 토착세력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는 점을 보면 이는 발리만의 특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국계 이주민들이 적응해야 할 대상이 달랐을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현상으로 지난 20201월과 3월호 연재에서 설명한 1960년대 인도네시아 정부의 의도와 중국공산당 정부의 수용으로 만들어진 푸젠성 발리촌의 풍경을 보면 돌아온 발리 출신 화교화인들의 경우 여전히 발리어를 쓰고, 가게 간판에 발리어를 병기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월리스가 관찰한 19세기 중반뿐 아니라 20세기 중후반까지도 발리의 중국계 이주민과 그 후예들이 충분히 현지화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일 것이다. 또한 1960년대 초중반 수하르토에 의한 공산당 숙청과 함께 학살의 피해를 당한 자바 및 수마트라의 중국인들, 1997년 수하르토 실각 후에 군부에 부역한 부유한 중국인들을 타도하자는 명목으로 역시나 공격을 당한 자카르타의 중국인들을 생각하면 매우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상술한 것처럼 발리는 네덜란드의 제국화에 끝까지 반항하고 저항한 몇 안 되는 지역이었고,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발리 내의 여러 힌두 왕국들은 합심하여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저항하고 있었다. 사실 월리스가 방문한 19세기 중반까지도 남아있던 여성들이 상업을 담당하여 남편을 먹여 살리는 등의 관습은 전형적인 고대 동남아시아 해상민족들의 관습으로 (역시나 월리스가 지적한 것처럼) 가부장적인 무슬림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계들은 자신들의 가내에 힌두 사원을 따로 둘 정도로 현지인과 구분되지 않는 적응성을 보인다.


그리고 이는 21세기인 현재까지 이어지며 여전히 발리의 중국계 이주민의 후예들과 자바를 비롯한 그 외 지역 중국계 이주민 후예들의 상반된 처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2018년 당시) 32살의 인도네시아 화예(華裔)인 이브 떼자(Eve Tedja)는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그녀가 인도네시아의 화인이라고 밝힐 경우 소수 이주민 종족으로써 받는 설움을 이해한다는 식의 동정의 시선들을 종종 받는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전역의 화인이나 화예들이 받는 설움을 충분히 잘 알고있어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서 화인으로 살면서 단 한번도 차별받는다거나 멸시의 시선을 받는 등의 취급을 느껴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이브 떼자는 발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계 발리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브 떼자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2018121<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기사는 수 세기 동안 발리섬에 정착하여 적응해 온 발리섬 중국계 이주민 후예들의 삶을 보여준다. 4세대 중국계 발리인인 이브 떼자의 경험에 따르면 발리섬의 중국계 후예들은 단순히 발리의 힌두문화에 일방적으로 동화한 것은 아니고, 그 내부에는 유교적 요소, 불교적 요소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발리 곳곳에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건축한 도교사원, 유교사원들이 종종 발견된다. 그런 이유로 대략 14,000명에 달하는 발리섬 내 중국계 발리인들의 경우 스스로 발리인이기도 하지만, 중국계라는 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주민 특유의 정체성 인식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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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세기에 걸친 발리섬의 중국계 이주민들의 존재로 인해

발리인들 역시 중국의 문화에 일부나마 영향을 받았는데,

위 사진은 12세기 발리의 왕 자야판구스(Jayapangus)가 중국인 공주와 결혼한 전설을 공연하는 모습

아래 사진은 중국 문화 특유의 사자춤을 접목한 것처럼 보이는

발리 전통 사자춤인 바롱 발리(Barong Bali)의 모습

 

발리에서 푸젠으로 건너 간 귀환 화교들의 발리문화적 요소와 발리에 남아있는 중국계들의 발리문화 적응의 양상은 고대 인도화와 이슬람화, 제국주의적 팽창, 2차 세계대전, 냉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된, 필자가 본 연재 전체에 걸쳐 주장하고자 하는 남중국해 초국적 중화성의 일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5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월리스 선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llace-line1.jpg#/media/File:Wallace-line1.jpg 

그림 2. 삽화

Alfred Russel Wallace, The Malay Archipelago, London: Macmillan and Co., 1890

그림 3. 발리 댄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hinese_influence_in_Balinese

Dance.jpg#/media/File:Chinese_influence_in_Balinese_Dance.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li_Lion_Dance.jpg#/media/File:Bali_Lion_Dance.jpg

 

기사 출처

https://www.scmp.com/lifestyle/article/2129683/how-balis-chinese-were-accepted-and-integrated-island-society-contrast?fbclid=IwAR0TMP5T8dAjAn69Efg5BnWIxAOmH3hyHfsws_iP82GflrX14yePb3CWUY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