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탄카키(Tan Kah Kee, 陳嘉庚)의 활동은 ‘친공(親共)’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는 1940년에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국민당 정부 관료와 지도부의 부패와 무능을 체감하고 있었고, 다양한 루트를 통해 화교화인들로부터 모금한 돈이 불분명하게 쓰이고 있었음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지지로 선회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45년 냉전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끝을 맺고, 미소냉전이 시작되는 와중에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소위 ‘튀는’ 인사에 속하게 된다. 그가 속칭 ‘친공’인사로 분류된 결정적인 사건은 1946년 9월 22일 미국으로 하나의 전보(telegram)를 보낸 것이었다.
탄카키가 1946년에 보낸 전보의 수신인은 각각 대통령 트루먼(Truman), 마셜(Marshall)장군, 주중대사 레이턴(Leighton)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화교지원기금조직(Overseas Chinese Relief Fund Organization)의 회장이라고 칭하면서 동남아시아 전체 화교화인(overseas Chinese in Southeast Asia)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였고, 그 핵심내용은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의 침입이니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영국령 말라야, 해협식민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화교화인 공동체에서 지도자격의 존경을 받고 있던 탄카키의 전보는 그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역의 화교화인들을 순식간에 친공산당파와 친국민당파로 갈라서게 만듦으로써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동남아 화교화인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었다. 실제로 CIA 역시 이 전보로 인해 영국령 말라야와 싱가포르 지역 화교화인들 사이에 우익과 좌익의 갈등이 촉발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리고, 중국에 국공내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베트남 북부가 호치민을 중심으로 공산화되었을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정글에는 수만 명의 말라야 공산군이 게릴라 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도미노 효과’를 걱정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말라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자본가’의 친공선언은 날벼락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미국의 CIA는 탄카키의 행보를 추적하게 된다. 또한, CIA의 입장에서 탄카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룩한 거대한 경제력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현지에서의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 1. 냉전기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
이 영향력에는 화교화인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정부에 가진 영향력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탄카키는 말콤 맥도널드(Malcolm MacDonald)와 절친한 사이로 식민지 관련한 문제에서 자주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영국의 수상을 지낸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의 아들로서 영국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고, 1946년에서 1948년 사이 영국령 말라야의 총독을 지낸 뒤, 1949년에는 동남아 식민지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을 역임한 대표적 정치인이자 관료였다.
탄카키의 이러한 친공행보를 후대의 역사가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단순하게 자본가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고 하는 사상에 ‘감화’된 특이한 인물로 판단해야 할까?
그러기에는 그가 친공활동을 벌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고, 많은 학자들이 그의 친공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끝없는 실망과 불신의 반작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향후 대륙의 정권을 어느 정부가 차지했을 때 중국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었다. 당시 동남아시아 역내 정치경제뿐 아니라 중국의 전후 회복에도 중요한 변수일 수 있었던 화교화인들의 행적과 여론을 조사하고 있던 CIA의 보고(1954년)에도 그러한 양상은 잘 드러나고 있다. 당시 탄카키뿐 아니라 대부분 중립성향의 화교화인들은 그들 본국의 이데올로기가 중요하기보다는 더 이상 침략을 받지 않을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세력인가의 여부가 중요했다.
“모든 화교화인들은 그 누구도 진정 정치적으로 어딘가에 열광하지는 않는다. 오직 생존에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권력을 가진 정부에 복종하고 협력할 것이다. 중국에서 자산을 잃어버린 구세대를 제외하고 그들 모두는 본국인 중국의 정치 혹은 정책 그 자체에 신경 쓰기보다는 중국이 과연 강한 국가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관심을 기울인다. (심지어) 그들의 열망은 다양한 차원에서 그들의 보호자로서의 중국의 강함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근본적 원칙을 넘어, 지식인들의 경우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애국심이 매우 강해지고 있다. 결국에는 중국이 그들의 진정한 모국인 것이다. 최소 70%의 지식인들은 공산화된 중국을 오직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강한 국가인가 아닌가를 두고 판단할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양상은 수많은 화교화인들이 제국주의의 피식민 이주민으로서 강한 본국을 원했다는 측면에서 국민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이 발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보면 냉전의 시대지만, 아시아지역에 한정해서 본다면 탈식민과 국민국가 성립의 시기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시대 피지배계층으로 신음하고 있던 수억의 아시아인들은 각자의 내셔널리즘을 바탕으로 독립된 국가를 꿈꾸게 되었고, 화교화인들이 뿌리내리고 있던 동남아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계를 뛰어넘는 제국의 프레임이 배타적 경계를 설정하는 국민국가의 성립을 맞이하면서 경계에 있던 이주민인 화교화인들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동시에 강한 본국이라는 내셔널리즘적 인식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탄카키 역시 부패한 국민당보다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청렴했던 공산당 지도부에 마음이 기울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화교화인들의 내셔널리즘에는 한층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한데, 바로 제국민도, 국민도 아닌 지역민으로서의 지역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화교화인들이 소위 ‘교향(僑鄕)’이라고 불리는 고향에 대한 지역성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지난 연재를 통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었는데, 탄카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진 교향중심의 사고방식은 익히 알려진 사실로써 1940년 가을 그가 한창 중일전쟁을 수행중이던 충칭(重慶)국민정부를 위문(및 헌금을)하기 위해 방문하였을 때, 푸젠(福建)성 정부가 아모이(Amoy) 대학(현 샤먼廈門대학)의 명칭을 푸젠대학으로 변경하려 한다는 계획을 듣고, 강경한 반대의견을 표명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남양화교(南洋華僑, 동남아 화교)의 반이 푸젠인이고, 그 다수는 아모이 지방 출신이다. 아모이는 그들의 창구이지만, 일본군 점령후에 화교는 고향을 상실했다. 지금 아모이 대학의 명칭을 잃게 된다면, 항전의 조기 승리와 향토회복의 실현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하고있는 남양화교의 의기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아모이는 샤먼의 민난지역 방언을 영어로 표기한 것인데 이를 푸젠대학으로 변경한다는 것은 수많은 샤먼출신 화교화인들이 본국에 기여하려는 동기를 잃어버리는 결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애국’ 역시 교향과의 사회문화적 연계라는 맥락아래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 화교화인들에 의한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모금이 사실 그들의 교향인 푸젠과 광둥의 주요 항구도시들이 점령된 후인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적극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 역시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는 ‘조국’의 정치적 안정이 기왕이면 부패에 물들어 있는데다 화교화인들을 착취하고 이용만 하려는 장제스 국민당 정부보다는 아직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기대해 볼 수 있는 공산당 정부에 의해 이룩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궁극적으로 그가 이끌고 있는 동남아 화교화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고향인 푸젠, 광둥지역의 안정화 및 번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중일전쟁 기간동안 동남아 화교화인들이 지원한 대량의 자본들이 국민당 정부에 의해 적절하게 쓰이지 않고 있었고, 특히 많은 화교화인들이 투자한 푸젠성의 경우 성장(省長)이 주도하여 부패와 착취를 일삼는 광경을 지켜본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탄카키가 중국으로 건너 간 이후에도 싱가포르에 그대로 남았던 탄카키의 외손자인 리썽지(Lee Seng Gee 李成義)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외할아버지인 탄카키가 공산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국민당을 비판한 것, 그로 인해 여러 서구 국가들로부터 친공주의자라고 불린 것이 모두 그의 교향인 푸젠지역의 근대화와 안정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특히 탄카키가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샤먼지역의 교육사업과 경제재건을 위해서였다는 것, 그리고 당시 중국으로 영구 귀국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후에 싱가포르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영국정부에 의해 입국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정부가 한국전쟁 직후 중국과 영국령 말라야 화교화인들 사이의 어떠한 무역활동도 금지했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카키는 그의 사위이자 역시나 유명한 자본가였던 리콩치엔(Lee Kong Chian 李光前)을 통해 인도네시아 공산세력과 소련 사이의 고무밀수를 주도한 것을 보면 영국이 탄카키의 입국을 거절한 것 역시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거절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다만 당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화교화인들 사이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냉전 이전 탄카키가 가진 의식에서는 교향인 푸젠지역과 그 지역 출신 화교화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지역이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서 ‘상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샤먼에 갔다가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행위는 같은 영역내부를 오고 가는 것에 다름 아니었고, 심지어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의 화교화인들이 냉전초기인 1950년대까지 꾸준히 가지고 있었던 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1950년 샤먼으로 간 뒤에 싱가포르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것에는 중국의 출국방해, 영국의 입국거절 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최소한 냉전과 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가진 호키엔(푸젠福建의 방언이자 해당 지역의 지역성을 상징하는 용어)과 호키엔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정당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그동안 전근대와 근대시기를 거치며 이주국과 교향 사이에서 본국의 정치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그들만의 사회문화적 네트워크를 유지해오며 번영을 누려온 동남아 화교화인들이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과 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가는 과정, 혹은 적응해야만 했던 맥락을 잘 보여준다.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적, 초지역적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호키엔이라는 지역성을 그대로 유지해오던 화교화인들은 아시아 각국이 독립하며 경계를 배타적으로 설정해감과 동시에 이념대립이 시작되던 시기를 맞아 그들의 정치적 위치를 분명히 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냉전초기 탄카키의 행적은 당시의 화교화인들이 더이상 호키엔이 아닌 중국인 혹은 중국계 말레이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전에 직면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과 국민 사이 호키엔의 정체성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잔존하고 있는데, 한국의 한자어 발음상 진가경이라 불리는 그는 현재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화교화인 사회에서는 탄카키라 불리고, 중국대륙에서는 천지아겅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저명한 푸젠출신의 화교화인으로서 그의 정체성과 중국의 국민으로서 그의 정체성 사이에서 냉전초 그가 중국대륙에 (자의든, 타의든) 남음으로써 후자로 결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문제임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범위는 단순히 이주민으로서 존재하는 동남아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과 가족, 친족이 머무는 중국 동남부지역, 푸젠과 광둥까지도 포함한 범위라는 것 역시 짐작할 수 있다.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중국 동남부 교향지역과 동남아 이주민들 사이에 형성된 ‘중화성(Chineseness)’의 도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림 2. 샤먼대학의 천지아겅 전신동상과
싱가포르 난쵸 고등학교(Nan Chiau High School)의 탄카키 흉상.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4】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본 연재는 김종호, 「친공(親共)과 애국 사이-CIA 문서를 통해 본 냉전초 동남아 화교화인의 대중(對中)인식-」, 『중국근현대사연구』 85집, 2020의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 및 첨가하였음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도미노 이론
https://en.wikipedia.org/wiki/Domino_theory
그림 2. 샤먼대학의 천지아겅 전신동상과 싱가포르 난쵸 고등학교(Nan Chiau High School)의 탄카키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