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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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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시대의 중국 노동자 _ 김태승

금년 522일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된 인민대회당에서 리커창(李克强) 국무원총리는 코비드19 상황 속에서도 도시 신규취업자를 900만 이상 늘림으로써 도시실업률을 6%대로 유지할 것을 천명하였다. 과거에 비해서는 다소 힘이 빠진 리커창의 이 보고는 코비드19 상황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역량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여러 항목에 걸친 보고에서 경제문제에 방점이 찍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 빈곤 지역의 구제에 대한 언급, 도시실업률 등이 노동자들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노동자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정부 대응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인대 개최 한 달 전쯤인 202057일 밤. 구금되어있던 5인의 노동운동가들이 갑자기 귀가했다. 이들의 석방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가족들은 놀라움 속에서 그들의 귀환을 환영했다. 이들 다섯 명의 노동운동가들은 2019121일부터 무리를 지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혐의로 체포되어, 선전시 바오안(寶安)구 공안국에 구류되었다가 13개월여 만에 석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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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가족과 상봉하는 장즈루

 

장즈루(張治儒), 우구이쥔(吳貴軍), 지엔후이(簡輝), 송지아후이(宋佳慧:광조우 Lide제화공장의 노동자. 노동자 대표로 사측과의 교섭을 성공적으로 관철), 허위안청(何遠程: 『集體談判論壇』의 편집인) 5인은 비공개 재판을 통해 앞의 2인은 3년형에 4년 집행유예 판결을, 뒤의 3인은 18개월의 징역형에 2년간 집행유예의 판결을 받고 각각 석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424일에 석방되었으나 코비드19로 인하여 14일 동안 검역소에서 생활하다가 이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의 가족들은 재판을 받은 사실이나, 이들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재판받는 과정에서 당국은 개인적으로 선임한 변호사를 해촉하고 국선 변호인을 받아들이도록 엄청난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장즈루는 호남성 출신으로 2007<춘풍노동쟁의서비스부(春風勞動爭議服務部)>를 설립하고 2010년 이후 수많은 노동쟁의에 참여하여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서 단체교섭을 주선한 바 있었다.(지엔후이도 이 조직에서 일하였다) 그러한 그의 업적은 심지어 관영매체인 <환구시보>에서도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우구이쥔은 2013년 홍콩계 자본의 디웨이신이라는 가구제조업체에서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여 공장폐쇄와 이전을 계획하던 사측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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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우구이쥔


그 결과 그는 체포되어 2014년 무죄 석방될 때까지 1년 이상 구금상태에 놓여있었다. 이 이후 그는 독립적인 노동자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그는 사회보험과 기타 마땅히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쟁취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2016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노동자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노동자들은 세계 최고이다. 전반적으로 중국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며 어떤 불평도 없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 중국노동자들은 다른 대안이 없을 때가 아니면 결코 저항하지 않는다."

 

우구이쥔이 볼 때, 중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합법적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며, 다만 생존을 위해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즉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시위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노동자조직인 <중화전국총공회>가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데 어떤 기능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개별 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떤 현실적 성과를 얻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우구이쥔이 나중에 무죄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이상 구금되어있었던 사실은 중국 당국의 노동자에 대한 관점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중국 국가권력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한계를 보여준다.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제출한 당대 중국사회 구조 변화 연구(當代中國社會結構變遷硏究)’에 따르면 중국사회의 5개 등급에서 노동자들은 중하층과 최저층에 속해 있었다. ‘해방전쟁의 주체였던 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를 중국의 방식으로 도입하면서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는 농민공은 1억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고, 이들은 서비스업의 52.6%, 제조업의 68.2%, 건축업의 79.8%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 하락과 불안정성의 심화와는 달리, 사영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소위 계급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고 알려진, 기업가의 공산당 가입허용 이후 단기간 안에 사영기업주 가운데 29.9%가 공산당원 신분을 얻고 있었다. 2002년의 자료에 따르면 사영기업인들은 현급 인민대표대의원에 5,400, 성급 대표에 372, 전인대 대표에 48인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현급 이상 인대 대표의 자산은 1,000만 위안, 전인대 대표는 대부분 1억 위안 이상의 자산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사영기업주들은 심지어 법원, 노동국 등에서도 지위를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중국의 노동자들은 국영기업의 사영기업으로의 전환과정에서, 중국 경제의 부침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해 왔음에 비해, 중국의 기업가들은 정부의 각 조직, 공산당, 전인대, 정협 등 국가권력의 각 부문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게다가 부패한 중국 관료제는 심지어 탈법적 기업권력에 대해서조차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보다는 기업가의 편에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오고 있다.


마치 1920년대 중국노동운동 맹아기의 현상을 보는 것처럼, 중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합법적 권리가 무엇이고, 자신들의 합리적 요구를 어떻게 관철시키고, 사측의 불법적 행위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배워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의 노동쟁의는 계속해서 급격히 증대되고 있고, 코비드19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18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인용한 내용은 중국노공통신에서 발행한 中国工人运动观察报告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다.

* 석방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www.clb.org.hk 참조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 중국노공통신

그림 2 : www.ny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