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요청한 연설에서 열역학 제2법칙으로 유명한 한 과학자는 “이제 인류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발견이 끝났으므로 세상은 그것을 활용하여 어떻게 유토피아를 만들 것인가”의 과제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허망함을 유럽인들이 깨닫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낙관적이었던 윌리엄 톰슨(나중에는 Baron Kelvin으로 불림)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07년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유토피아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의 교만은 그가 아는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갖는 야만적 욕망을 성찰할 수 없었다.
말은 일단 밖으로 표출되어 유통되면 발화자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서 스스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간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집에 갇혀있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TV 화면과 배달되는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 수많은 말들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배우게 되는 것은 말을 제대로 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과학자’ 켈빈남작의 호언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언론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질까 궁금할 정도로 난장판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거기에는 인문학자들을 포함한 전문가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된다. 언론을 통해 발화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상당수의 언론/학자/전문가들이 미국 경제학자 크루그먼의 표현인 Zombie Idea에 오염된 영혼 없는 욕망과 증오의 수사학을 당연하듯이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우리 언론에 대해 접할 때, 이상하고 기묘한 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언론의 특징을 나름대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읽거나 듣기가 정말 피곤해지니까 말이다(사실 안 보고, 안 들으면 되지만 그러기가 참 어렵다).
우리는 현실의 어떤 부분을 보고 있을까?
우선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은 다른 모든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들의 욕망을 가장 중시한다는 점에서 좀비 언론인데, 이들의 특징은 매우 게으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취재하고, 자료를 찾고, 분석하고, 체계를 세우고 그래서 자신이 확인한 진실을 기사화하는 그런 언론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기사를 작성하기보다는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던져 준 자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욕망에 맞추어 작문을 하는 게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그 나머지 시간에 무엇을 할까? 항상 바쁜 언론인들을 보면 정말 그들의 시간활용법이 궁금하다. 하긴 TV에 나와 특정 정파를 편들고 나서 바로 그 정당으로 입당하는 언론인이 있으니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두 번째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한국 언론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진심으로, 인정하는 법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듣는 귀가 퇴화되어 특정 소리 이외의 소리에는 반응할 수 없게 된 한국 언론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보도가 틀렸다는 지적이 제기되면 은밀하게 기사를 고쳐 게재하되 자신의 오류를 감추는 방향으로 수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어 수정의 이유를 밝히거나 경과를 알리는 일은 거의 없다. 소위 ‘권위’ 있는 언론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취향과는 다른 정파나 인물 등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언론은 ‘분열증적 사고’에 익숙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세 번째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것은 기사에 등장하는 전문가, 혹은 이익집단 등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이다. “학계의 전문가”, “법조계”, “국민” 등으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는 근거로 사용되는 ‘정체가 모호한 익명’의 취재원의 의견 인용은, 발화자의 견해가 마치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것처럼 위장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실 모호성 속에 숨어서 자신의 견해를 일반화시키고 신뢰도를 높이는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이 언론계만은 아니다. 예컨대 인문학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동양/서양이라는 표현을 보자. 공자를 연구한 학자는 자신의 연구영역을 동양철학이라고 분류하길 좋아한다. 로마사를 강의하는 대학에서 그 과목은 서양고대사로 분류되어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유럽, 중국으로 특정했을 때 부딪히게 되는 연구자나 교육자들의 학문적 한계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심지어 “아시아는 하나”(언제 아시아가 하나였던 적이 있었나?)라는 엉뚱한 표현들이 대중사회에서 유통되고, 일본에서 영국에 이르는 광활한 대륙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문화 유산들을 단순화시켜 설명하는 논리들이 힘을 얻는다. 모호성은 그러니까 지적 한계 혹은 자신의 논리적 결함을 감추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네 번째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과거의 보도가 엉뚱하거나, 크게 잘못되었음이 뒤에 명백하게 확인되었을 때도 자신들의 당파적 견해와 대립 되면,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용자들에게 사과하거나 보도내용을 절대로 정정하지 않는다(이미 독자들이 그것을 잊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굳건한 뻔뻔함’은 미시적 사실관계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되어있다. 그것은 왜 언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식민지 경험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의 식민지 유산이 우리의 인문학적 전통에 내재되어 있음은 학문사를 연구해 본 학자들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에 내재된 일제의 유산에 대해서는 친일/항일의 프레임으로만 논란이 되었지 언론사 문화의 본질의 문제로 접근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언론계의 내부에 흐르는 일본문화는 친일/항일의 논리보다 훨씬 깊은 자기성찰을 요구한다. 소위 ‘전통있는’ 언론일수록 그러한 식민지 문화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우리 언론사에서 일제나 독재에 저항한 것은 ‘기자’들이었지 ‘사주’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소유권의 변동없이 이어 내려온 언론사에게서 일제문화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한국 언론의 기사작성 방식이나 논조는 현대 일본의 우익언론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 한국 일부 언론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해야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러한 좀비언론의 기사로 나중에 역사공부를 할 후학들의 고충이 미리 걱정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좀비언론의 선조가 일본이니 과거 일본 언론의 기록이나 자료를 사용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사료나 민간의 기록들에 대한 상당한 신뢰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학자는 명백히 존재하는 실존인물의 증언조차 일본 관료의 기록에 기대어 신빙성을 판단한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 현재와 과거는 다르므로 일제 강점기 일본의 기록은 신뢰할만하고 지금의 일본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에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일본 관료나 일본 상업 언론들이 보이는 한심한 작태들은 자신들의 말에 대한 책임문제에서 사실상 면책을 주장하고 달리 존재하는 진실을 ‘이지메’ 전략으로 제거하는 저열한 좀비적 경향을 표상할 뿐이다.
말이 그리고 언론이 오늘날 그려내는 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한비자의 외저설(外儲說)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왕이 식객 중에 그림 그리는 자가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데 어느 것이 가장 어려운가라고 묻자 식객은 ‘개나 말이 가장 어렵다’고 답한다. 다시 어느 것이 가장 쉬운가 묻자 ‘도깨비가 가장 쉽다’고 답한다. 사실 인문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그리기 어렵기 때문에 개를 그려야 하는데도 도깨비를 그리면서 이거야말로 ‘진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일 것이다. 좀비언론을 사람의 말을 하는 언론으로 어떻게 해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긴 좀비의 세계에서는 좀비언론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17】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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