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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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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싼과 중국공산당 100년 _ 김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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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창당 100주년이 1년여를 남겨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중공 100주년에 즈음하여 자연스럽게 마오쩌둥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할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은 조금 이색적인 인물을 통해 중공 100을 평가할 것이다.


사실 마오쩌둥이 건당(建黨)과 건국(建國)의 핵심 인물인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개혁개방 이후 공식화된 중공의 100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기에 매우 부적합한 인물인 것도 분명하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이 인민일보에 게재한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유명한 제목의 대자보는 차치하고도, 중요한 2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오쩌둥은 1927년 당시 러시아 조차지였던 우한(武漢)에서 개최된 [8·7회의]에서 당 중앙을 반혁명 집단으로 규정하고 상급기관은 하급기관의 보고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비난했다. 이어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후 홍군을 사병화했고, 폭압적으로 주변의 취약한 홍군 세력들을 흡수했으며, 심지어 그의 군대를 배경으로 당 중앙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훈계하는 서신까지 보내기도 했다. 이에 1929년 중반까지 당 중앙은 그의 행보를 독립국화로 규정하고 철의 기율로 다스려야 한다고 수차례에 걸쳐 경고하기도 했다.


둘째, 국공내전 초기였던 19473월 중공의 핵심 근거지였던 옌안(延安)이 함락된 후, 당 중앙은 농민의 급진적이고 신속한 자율무장, 급진세력화, 정치세력화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의견을 좇아 대중을 놓아버리는 노선을 공식화했다. 평소 당 조직을 중시했던 류샤오치 조차 당해 84당원은 대중의 비판과 검정을 받아들여야 하며,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고 대중의 결정을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할 정도였다. 이에 당시 변구의 한 기층 농민협회는 공산당과 마오쩌둥 주석 모두 우리가 간부에 대해 감독하고 심사하며, 비판하고 처벌하며, 칭찬하고 교육할 권리가 있다고 허가했다. ... 농민을 위해 공작하지 않은 간부가 정권을 장악한 지방의 경우 우리 농민협회가 완전히 정권을 대신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작성하고 선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각지에서 농민의 당 간부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이 확산되었는데, 산시성 등지에서 농민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살해한 간부만 357명이었고, 산시성, 차하얼성, 허베이성에서 당적이 정지된 사람도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마오쩌둥의 권력 기반은 이 아니라 군대·농민·대중이었고, 그는 이들을 기반으로 개인적으로는 항상 당 위에 군림하려했다. 일례로 혁명 성공의 토대로 칭송받는 마모쩌둥의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은 사실 그가 지역의 일개 지도자에 불과하던 시기 코민테른과 당 중앙의 도시 중심의 봉기 노선 명령을 거부하고, 독선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공 내부에는 심각한 분파 갈등이 발생하여 마오쩌둥을 따르던 무수한 간부들이 죽거나 고문을 당했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이들 중 대표적 지도자들 중에는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이 있다.

 

사실 이는 마오쩌둥이 목숨을 걸고 견지한 당치(党治)의 중국화로 규정할 수 있다. 즉 그는 혁명 과정에서는 당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큰 해악이 된다고 믿었기에, 대중 정치를 통해 당 조직(간부)아래로부터 위로개조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이는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2번의 혁명(2월과 10)을 주도하는 가운데 우물쭈물하는 볼셰비키들을 계속 다그치며 봉기의 선두에 서며 외쳤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가치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공식화된 중공의 당치는 혁명 성공 후 보수화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내세운 철의 기율’, 특히 스탈린이 193554[크레믈린 궁에서 거행된 붉은군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며 간부는 노동자들을 성실하게 개발하고 충실하게 도와주며 성공을 격려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라는 당-간부-대중으로 위계화된 가치와 유사하다. 이는 2017725[인민일보]에 게재된 철의 기율로 종엄치당(用铁的纪律从严治党)’이라는 시진핑식의 당치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중공 창당 100주년에 즈음하여 볼셰비키의 철의 기율이 중공 당치의 중요한 축으로 확립되는 데 기여한 지도자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바로 리리싼이다.

 

리리싼(李立三)은 1925년 겨울 러시아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적색 직공 국제회의] 중공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당시 중공 최고지도자로 인정받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모스크바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사실 리리싼은 19229월 안위안(安源)광산 대파업을 이끌며 중공 내 최고의 노동운동 조직가로 인정받았고, 특히 1925[5·30운동](상하이에서 당이 주도한 반일 시민운동으로, 모스크바에서의 수십만 명이 참여한 지지행진과 일본 노동단체의 지지성명 등을 유발했다)을 주도하며 국제적 명성까지 획득했다.

 

물론 리리싼은 지금도 그가 주도한 도시 무장폭동 노선의 참혹한 실패로 인해 비난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 노선은 1928년 중순 코민테른 [9차 확대회의]에서 통과된 [중국문제 결의안]의 결정을 그대로 집행한 것에 불과했다. 결의안의 내용은 현대 중공 당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기에 몇 가지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첫째, (1927년 우한에서 개최된) [8·7회의]는 중공 볼쉐비키의 시작이고, 볼쉐비키 정신을 따라 무장폭동의 총방침을 결정했다.

둘째, 언젠가 총체적인 새로운 고조 상황 하에서, 혁명은 우선 1개 성 또는 여러 성의 주요 지역에서의 승리가 가능할 것이다.

셋째, 중공은 진정한 민주집중제를 실행해야 하고, 당내 기율과 당 지도기관에 대한 신뢰를 허무는 극단적 민주주의 경향을 반대해야 하며, 당내 지방주의와 소단체주의 경향도 숙청해야 한다.

 

코민테른은 이 결의안을 관철하기 위해 노동자 출신의 샹중파(向忠發)를 중공 총서기로 임명하고, 그의 보좌역으로 노동운동 조직가였던 리리싼을 비서장으로 배치했다. 다만 노동자 출신 샹중파의 낮은 문식력 때문에, 리리싼이 코민테른과의 소통은 물론 당내 업무를 관장했고, 그 결과 1931년 초까지 중공중앙의 활동은 리리싼 시기로 명명되고 있다.

 

코민테른의 [중국문제 결의안]에서 드러나듯, 리리싼은 코민테른의 지도를 충실히 집행하려 했고, 그 결과 중공 조직의 볼쉐비키화와 체계적인 당군관계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째, 리리싼은 [8·7회의]을 기점으로 각 지방에서 무분별하게 난립한 마오쩌둥, 주더, 펑더화이, 리원린(李文林) 등 군사지도자들을 볼쉐비키적 기율로 관리하기 위해 순시원 제도를 강화하여 조직을 정비했다. 또 리리싼은 마오쩌둥의 극단적 민주화를 제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신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 군사세력 간의 형식적 위계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확립될 수 있었다. 물론 당시 중공중앙은 지방 군사지도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제력은 물론 그들을 회유할 수 있는 재정도 없었다. 따라서 리리싼은 서로 경쟁적인 지방 군사지도자들 간의 갈등을 이용했는데, 예를 들어 마오쩌둥으로부터 위협을 받던 리원린 세력은 당 중앙에 의존하여 마오쩌둥에 대항하려 했고, 이를 위해 당 중앙에 운영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둘째, 리리싼 시기 처음으로 당 중앙은 조직화된 대규모 군사 봉기를 기획·관철했다. 그 결과 지역에 흩어져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홍군들이 당 중앙의 지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른바 당군관계의 기틀이 확립될 수 있었다. 중공 초기의 무장봉기는 1927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실상 전혀 체계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중앙의 지도를 거부하는 일종의 지방 군벌세력들이 난립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리리싼은 상급기관인 코민테른 극동국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스탈린 등을 설득하여, 1930년 여름 대규모 도시 무장 폭동을 관철했다. 물론 폭동은 참혹하게 실패했고, 그는 실각 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대규모 무장 폭동]그 과정에 집중해서 볼 때, ‘중공 창당 100주년에 있어서 결코 경시될 수 없는 유산을 낳았다. 즉 당 중앙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지방 군사세력을 일원적으로 통합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지도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펑더화이가 이끌던 홍3군단이 1930726일 새벽 창사시를 점령하고 약 11일간 통치한 후 패퇴한 사실은, 그 자체로 스탈린, 코민테른, 나아가 중공 지도자들 전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당 중앙은 마오쩌둥의 홍1방면군에 창사 재점령을 지시했는데, 이런 당 중앙의 지시는 대다수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동의를 이끌어냈다. 즉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각지에서 산적처럼 활동하던 홍군들이 처음으로 당 중앙의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근대적 군대로 변신한 것이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중공 혁명의 요람은 마오쩌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옌안시기로 공식화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중공 혁명의 요람은 마오쩌둥 영웅화가 아닌, 중공이 볼셰비키적 철의 기율을 내부화하고 또 당군관계를 확립한 시기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리리싼은 지금도 여전히 실패한 지도자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연구자들이 마오쩌둥의 숙명적 라이벌로 왕밍을 새롭게 조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왕밍이 러시아에서 여생을 보내며 소련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리리싼은 중공은 물론 소련공산당으로부터도 버림받았기에,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창당 100주년을 목전에 둔 중공이 철의 기율에 근거한 당국관계 및 당군관계를 역사화하기 위해 누구를 선구자로 내세울지는 사실 매우 난감한 문제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실제 후보는 리리싼 또는 왕밍이 적합하지만, 전자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또 후자는 스탈린주의자로 모두 중공 발전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 인물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의 기율로 종엄치당을 내세우는 지금의 중공이 마오쩌둥을 당의 발전을 주도한 선구자로 내세우는 것은 심각한 난센스에 해당하지 않을까


김판수 _ 한림대학교 강사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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