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며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로 인하여 의도치 않게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도시가 있다. 바로 우한(武漢)이다. 우한은 중국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도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세계 전역으로 퍼지면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우한 폐렴’이라는 말과 함께 우한의 (불명예스러운) 인지도도 함께 높아졌다.
우한의 현재
그림 1. 우한 동호
그림 2. 우한 친타이대극원 (琴台大劇院)
우한은 창쟝(長江) 중류에 위치한 대도시이며, 후베이성(湖北省)의 성도(省都)이다. 우한이 자리한 후광(湖廣) 분지는 고대에는 운몽택(雲夢澤)이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던 곳으로서, 호수와 늪지가 곳곳에 분포하여 수운 교통망이 발달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특히, 15세기 후반에 한수이(漢水)의 물길이 바뀌어 구이산(龜山) 북쪽을 경유하여 창쟝과 합류하게 되면서, 이후 우한 지역은 ‘강의 도시(江城)’라는 별칭을 얻으며 교통과 상업, 행정, 문화의 중심지로서 더욱 번영하였다. 지금도 우한은 동쪽으로는 창쟝삼각주경제지대와 통하고, 남쪽으로는 창주탄(長株潭) 도시권역(창사-주저우-샹탄으로 구성된 후난성 경제발전 핵심지대)과 연결되며, 서남쪽으로는 쓰촨 등 내륙지대와 연계되는 경제‧산업‧문화‧교통 방면의 핵심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우한의 과거
우한 일대가 중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상(商) 시기이다. 현재의 우한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판롱후(盤龍湖) 인근에서 약 3,500년 전의 도시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대량의 무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상의 남방 군사 거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이곳은 창쟝 남안의 우창(武昌)과 북안의 한양(漢陽)을 중심으로 발달해왔다. 삼국시대에는 손권(孫權)이 창쟝 중‧하류 일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우창 일대에 하구성(夏口城)을 지었고, 유기(劉琦)는 오(吳)에 대항하기 위하여 한양의 구이산 기슭에 노산성(魯山城)을 축조하였다. 당송(唐宋) 시기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은 군사적 거점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우한 일대는 중국의 중앙에 위치하여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한(後漢) 시기부터 상업 중심지로도 성장하였다. 하구성은 우창 일대의 정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관료집단과 주둔군, 도시 주민의 생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상업경제가 발달하였다. 당대(唐代)의 한양에는 창쟝 상류와 중‧하류 일대의 상선이 모여들었고, 송대(宋代)에는 수많은 점포가 들어서 상업이 활기를 띠었다.
원(元) 시기에 우창은 호광행성(湖廣行省)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 처음으로 1급 지방행정단위의 치소가 되었고, 명(明) 태조 연간에는 우창의 규모가 더욱 확장되어 남방 최대 규모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특히, 명 중기에는 한수이의 물길이 바뀌면서 우한 일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5세기 후반에 한수이가 한양의 구이산 북쪽을 지나 창쟝과 합류하게 되었고, 한수이 북안 지역은 이전까지는 한양에 속했지만 이때부터는 한커우(漢口)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한 일대는 창쟝 남안의 우창, 창쟝 북안과 한수이 남안의 한양, 한수이 북안의 한커우를 핵심으로 하는 세 개의 도시가 강을 사이에 두고 함께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명 후기에 한커우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전국 ‘4대 명진(名鎭)’의 하나가 되었으며, 청 말에는 개항장이 되면서 대외무역의 중간 거점으로 더욱 번영하였다.
신해혁명(1911년)과 국민혁명(1924-28년)은 우한에 또 한 차례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11년에 우창에서 신해혁명이 처음 발발하면서 우창은 ‘수의지구(首義之區: 처음 봉기를 일으킨 곳)’가 되어 혁명진영의 정치적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그 위상이 다소 낮아졌지만, 국민혁명의 발발과 함께 우한은 다시 혁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926년에 국민혁명군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 일대가 우창시(武昌市)와 한커우시(漢口市)로 개편되었고, 1927년에는 국민정부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우창시와 한커우시, 한양현성(漢陽縣城)이 병합되어 ‘우한특별시(武漢特別市)’로 개편되었다. 오늘날의 ‘우한시’가 탄생한 것이다. 우한국민정부가 결국 실패하면서 혁명정부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지 못했지만, 이후 1949년까지 우한시는 국민정부의 중앙직할시 지위를 유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는 1954년에 후베이성 성도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한, 전후 수도의 후보지로 거론되다
중국 중부 지역의 핵심 도시로서 우한이 갖는 위상은 1940년대에 전개된 건도(建都) 논쟁에서도 확인된다. 1940년대 초반부터 중국 사회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국의 수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둘러싸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쟁이 전개된 적이 있었다. 이때 주요 후보지로 거론된 도시가 베이징과 난징, 시안, 그리고 우한이었다. 적지 않은 논자들이 우한을 전후 중국의 수도로 내세웠는데, 이는 그만큼 우한이 중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근거는 바로 우한이 중국의 지리적 중심이라는 것이다. 우한은 중국 국토의 기하학적 중심(中心: 가운데)은 아니지만, 중국 경제 중심(重心: 무게중심)들의 중심(中心)이었다. 또한, 우한은 중국의 인구와 자원, 산업이 집중된 동남부와 전후 개발이 시급한 서북부의 중간에 위치하여, 동남의 자원을 동원하여 서북 개발을 추진하기에도 적합한 곳이었다. 이는 전후에 국토의 균형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는데, 어떤 면에서는 동서 간 격차로 ‘서부 대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현대 중국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우한이 전국적 교통망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우한이 지리적 중심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도 우한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망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우한은 중국을 동서로 횡단하는 수운 교통망과 남북으로 종횡하는 육상 철도망이 교차하는 곳으로서, 사면팔방(四面八方)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이 발달한 곳이다. 전근대 시기부터 창쟝을 통해 충칭부터 상하이까지 연결되는 수운 교통체계가 발달하였고, 창쟝 유역의 복잡한 하천 네트워크와 대운하를 통하여 전국의 주요 경제구역을 연결하는 수운 유통망이 발전하였다. 또한, 1906년에 베이징과 우한을 연결하는 징한철로(京漢鐵路)가 개통되고, 1936년에는 우한과 광저우를 연결하는 유에한철로(粤漢鐵路)가 개통되면서, 우한은 철도를 통하여 중국의 남북을 관통하는 육상 교통망의 중심이 되었다(1957년에 우한창쟝대교가 완성됨에 따라 베이징과 광저우를 직통하는 징광철로(京廣鐵路)가 완성되었다). 오늘날에도 창쟝 유역은 ‘10대 주요 항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규모의 항구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데, 우한은 그 중심으로서 수많은 철도와 도로로 연계된 종합적 교통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세 번째 근거는 우한이 전후 국방전략의 중심으로서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우한 주위에는 산과 구릉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호수가 곳곳에 분포하여, 수도 방어에 유리한 지형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우한은 전후에 예상되는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기에도 적합한 곳으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우한이 북방 대륙과 남방의 해양 중간에 위치하여 양쪽으로 함께 대응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수천 년간 북방 대륙 세력의 위협에 직면해왔고, 19세기 중엽 이후로는 남방 해양세력의 위협에 시달려 왔는데, 남북의 위협에 동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위치한 우한이 가장 적절하다는 논리였다. 우한 지지자들이 보기에 난징이나 베이징은 바다와 너무 가까워 위험했고, 시안은 바다와 너무 멀어 부적절하였다.
마지막으로, 우한이 중국 경제와 정치의 중심이라는 점도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우한이 위치한 후광분지는 중요한 식량 생산지역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 중의 하나였고, 이 일대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하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兩湖熟, 天下足”). 우한을 수도로 삼으면 경기 일대의 식량 공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무역 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이용하여 배후지의 대외 수출을 증진하기에도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또한, 우한은 신해혁명이 처음 발발한 곳으로서 ‘민국’의 발상지였다는 점에서도 굳건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고,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국민혁명 시기에 전국 혁명의 중심으로 부상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물론, 우한에 대한 반론도 많이 제기되었다. 우한 지역은 수재가 빈발할 뿐만 아니라 지대가 낮아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하다는 점, 수도로 삼기에는 도시 면적이 협소하다는 점, 창쟝을 통해 적의 군함이 수도를 직접 위협할 수 있다는 점, 하천과 호수가 많아 지하 방공호를 파기 어려워 방공 작전에 불리하다는 점, 여름의 심한 더위로 인하여 정부의 업무 효율성이 저하된다는 점 등, 우한의 다양한 단점들도 지적되었다.
결과적으로 우한은 전후 중국의 수도가 되지 못했다. 당시 중앙정부였던 국민정부는 1946년에 중일전쟁 발발 전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귀환하였고,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한 뒤에는 베이징이 수도로 결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의 논쟁에서 제기된 우한의 몇 가지 장점들은 현재의 우한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우한은 중국 교통망의 중심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1990년대 초기의 대외 개방 확대와 함께 세계 경제와의 연계도 확대되었다. 최근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은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도시로 부상하고 있는 우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는 사람과 물자의 활발한 교류와 이동이 전염병의 확산을 수반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중국과 우한에 대한 비난보다는 전염병의 확산에 대한 세계사적 관점에서의 대응에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중국문화오디세이 4】
이원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 이 글은 2020년 3월 24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칼럼 [차이나 로그인]에 게재된 것임.
* 이 글에 사용한 이미지는 화중사범대학 풍국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