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 대도시인 호찌밍시의 쩌런(Chợ Lớn; 큰시장이라는 뜻)지역은 베트남 속의 작은 중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약 80만명에서 120만명에 이르는 베트남 화교 중 약 50만여명이 모여 생활하고 있는 쩌런지역(현재의 호찌밍시 5군과 6군지역)은, 현대화가 급격히 진행 중인 호찌밍시에서 시장, 사원, 음식점을 찾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리는 상업지구이자 과거의 역사와 전통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쩌런지역에는 다수의 화교 회관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남아있다. 그 중 3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온랑회관(Hội quan Ôn Lăng; 오늘날에는 온랑사원 혹은 관음사원으로 부른다)은 복건성 천주(泉州)지역에서 베트남 남부로 이주한 베트남 화교들의 역사와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중국 남부지역민들이
바닷길을 통해 베트남 남부지역 특히 호찌밍시로 대규모 이주하게 된 역사는, 대체로 1679년 명의 장수였던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彥迪) 등이
청의 지배를 피해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50척의 배로
베트남 남부로 이주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상 정치적 난민이었던 이주민들은 ‘밍흐엉’ (Minh Hương; 明香 훗날 明鄉으로 공식화)’으로 불리며 상당수가 호찌밍시 북동쪽에 위치한 현재의 동나이(Đồng
Nai)성에 정착하였는데, 그 일부가 쩌런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현재와 같은 화교 집단주거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림 1. 온랑회관. 베트남 호찌밍시 5군의 라오뜨(老子)거리 12번지 소재.
17세기말 현재의 호찌밍시에 정착했던 복건성 출신 중국인들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청의 통치를 피해 베트남으로 이주했지만,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영토 확장을 꾀하던 응우옌 영주(Chúa Nguyễn)와 크메르(Khmer) 왕국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메콩강 유역을 응우옌 영주가 정복한 후, 삶이 점차 안정화 되어가자 동향출신으로 같은 지방어를 사용하던 복건성 출신화교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낼 회관을 지었다.
18세기 초(1740년) 건설된 ‘복건이부회관(福建二府會館; Hội quán Nhị Phủ 혹은 二府廟; Miếu Nhị Phủ)’은 복건성 천주와 장주(漳州) 두 지역(二府)에서 이주한 이들이 함께 지은 최초의 사당이었다. 그러나, 곧 내부에 불화가 발생했고 결국 천주출신 복건인들은 온랑회관을 장주출신 복건인들은 하쯔엉회관(Hội quán Hà Chương)을 각각 별도로 건설하게 되었다.
오늘날 어떤 연유로 각각 회관을 따로 건설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기에 자료가 충분치 않으나, 17세기말(1697년) 베트남 중부 호이안(Hội An)에 건설된 복건회관(Hội quán Phúc Kiến)과는 달리 쩌런지역에서 이주민들의 분리 양상이 드러난 것은 복건성 이주 정착민들의 수가 상당했으며, 복건성 출신이주민들의 ‘동향’ 정체성이 분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림 2. 복건이부회관 (福建二府會館; Hội quán Nhị Phủ).
베트남 호찌밍시 5군 하이트엉란옹(海上懶翁)거리 264번지 소재.
‘온랑’이라는 이름은 복건성 천주지역의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온랑회관은 본래 ‘천후성모(天后聖母; Thiên Hậu Thánh mẫu)’와 여러 도교 신들을 모시는 사원이었는데 훗날 관음보살을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관음사원’으로도 불리고 있다. 사원은 중국식 건축 양식인 내부는 ‘공(工)’자 형태를 외부는 ‘구(口)’자 형태를 보이는 ‘내공외구(nội công ngoại quốc)’를 따르고 있고, 지붕과 처마는 곡선과 장식을 통해 복건성 특유의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사원은
길을 사이에 두고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길 건너편에 방생호(放生湖; Ao Phóng Sinh)가 위치하고 있어 인파로 북적거리는 쩌런의 시장거리에 자연적 경관을 더하는 건축미가
일품이다. 베트남 정부는 이러한 온랑사원의 독특한 건축미와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2004년 ‘국가 건축예술 유산(di
tích Kiến trúc nghệ thuật cấp quốc gia)’으로 지정한 바 있다.
그림 3. 온랑사원(Chùa Ôn Lăng) 건너편 방생호(放生湖; Ao Phóng Sinh)
19세기 중반 이후 쩌런지역은 활발한 경제활동 중심지가 되었고 화교인구도 급속히 증가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기, 화교들은 메콩 델타지역에서 생산되는 쌀 수출을 독점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복건성 출신 화교들은 지역에서 특히 해상무역에 두각을 나타냈고, 점차 주요한 경제활동 주체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쩌런지역의 화교 사업가들 중, 복건성 출신 ‘쭈호아(Chú Hỏa; 본명 黃文華)’는 2만호에 이르는 부동산을 소유한 거부(巨富)였는데, 공동체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특별히 인정받기도 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베트남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현재의 ‘호찌민시 미술박물관(Bảo tàng Mỹ thuật TP. HCM)’은 ‘쭈호아’ 가족이 소유했던 거대하고 웅장한 저택이었다.
쩌런을 중심으로
베트남 남부지역의 경제활동을 주도해 가던 화교들은, 1955년 응오 딩 지엠(Ngô Đình Diệm)의 베트남공화국이 펼치기 시작한 동화정책에 의해 큰 변화를 겪었다. 화교들은 동화정책으로 인한 정치적 압박으로 대만으로 이주를 결정하거나 경제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베트남 국적을
취득해야만 했다. 한동안 시민권의 혼란과 정치적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화교공동체는 ‘베트남전쟁’시기 활발한 경제활동 중심지로 거듭 태어난 쩌런지역에서
생산과 무역을 담당하며 다시금 존재감과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베트남전 종전’ 이후 베트남 당-국가가
급속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쩌런의 화교들은 전례없이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상황과 마주하게 됐다. 화폐개혁, 사회주의적 국유화정책 등은 화교들의 경제활동 기반을 근본적으로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곧이어 벌어진,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1979년 베트남과 중국간의 전쟁은 삶의 기반이 무너져가고 있던 베트남 화교들의 대규모
탈출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잃고 쩌런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화교들은 베트남의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머이(Đổi Mới)’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시장경제가
다시 생기를 되찾기 시작한 이후에 귀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축적된 상업과 무역활동 경험을 활용해, 빼앗기고 파괴되었던 ‘그들의 쩌런’을
빠르게 되찾고 복구해갈 수 있었다.
오늘날 쩌런지역은 베트남 남부지역 화교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호찌밍시의 문화적 전통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귀환 화교’들이 몰려들면서 한동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던 쩌런의 사원들도 다시 문을 열었고, 온랑사원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온랑사원은 귀환화교들과 시장경제 활성화에 힘입어 1990년대 초 대대적인 개보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복건성 천주출신 화교들만이 아니라 베트남 남부지역 화교의 역사를 대변하며, 베트남인과 외국인들도 찾아오는 명실상부한 베트남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그림 4. 입구에서 바라본 온랑사원 내부 모습
그림 5. 사원의 제단
그림 6. 사원 방문객
그림 7. ‘해불양파(海不揚波)’를 기원하는 관음(Quan Âm)상
그림 8. 사원내 손오공(Tôn Ngộ Không) 제단.
베트남에서 서유기(Tây Du Ký)는 가장 인기있는 중국고전중에 하나이다.
【이미지 중국 3】
심주형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