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중국학술원 이정희교수의 칼럼【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를 연재합니다. 베트남과 한반도는 각각 중국대륙과 육지로 맞닿아 있고 역사적으로도 중국과 각각 유사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역사적 요인으로 양 지역의 거주 화교의 형성 및 발전사에서도 유사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두 지역 화교 간에는 서로 다른 양상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는 한반도화교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양 지역 화교를 비교 분석하고자 합니다.
겨울비가 내리는 1월 22일 대구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번지 소재의 모명재(慕明齋)를 찾았다.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조선 원군 명조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부관이었던 두사충(杜師忠)을 기리는 재실(齋室)이다. 두사충은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알아차리고 조선에 귀화했으며, 그 후 대구에 정착했다. 두사충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으로 참전했다 정착한 장군은 이외에도 많았다. 남원에 정착한 천만리(千萬里), 경주 정착의 편갈송(片喝頌), 한양 정착의 장룡(張龍), 성주 정착의 서학(徐鶴)과 시문용(施文用), 군위 정착의 장해빈(張海濱)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조선에 정착한 후 후손을 두었으며 가문의 족보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림 1. 대구시 수성구 소재의 모명재(필자 촬영)
그런데 임진왜란 때보다 더 많은 중국인이 조선으로 이주한 때는 명청교체기였다. 명조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정치적 원인 등으로 조선에 망명하는 중국인이 많았다. 후금의 명조 공격을 막기 위해 1620년대 조선에 파견된 모문룡(毛文龍) 부대의 조선 주둔으로 인해, 평안도에 이주한 중국인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뿐 아니라 명조의 지식인 다수가 조선으로 망명했다.
조선 왕조는 조선에 이주한 이들 명조의 이주민을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부르며, 일본인과 여진족 귀화인인 향화인(向化人)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황조유민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조를 위한 조선 왕조의 제사 때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청교체기에 베트남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명조의 유신(遺臣)인 진상천(陳上川)과 양언적(楊彦廸)이 1679년 3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낭항에 이주했다. 베트남의 광남완조(廣南阮朝)에 망명한 명조 유신의 일파는 호이안에 머물면서 명향사(明鄕社)라는 마을을 설립하고, 진상천과 양언적 일파는 메콩델타 지역의 개척에 종사했다. 이들의 정주는 베트남 중남부의 교통의 요소에 ‘중국계이민’의 집주지가 생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국계이민은 베트남 남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7세기 말 베트남의 판도에 포함된 현재의 호찌밍과 비엔호아에서 명향사와 청하사(淸河社)를 설립했다. 명향사와 청하사는 하나의 중국인 마을을 형성했으며, 출신지별로 5개의 방회(幇會)를 만들어 활동했다. 명향사에 적을 둔 중국인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조직 내 자치가 용인되었고, 과거 응시의 자격이 부여되었고, 토지취득의 권리가 부여되는 우대조치를 향유했다. 프랑스통치시기(1887-1945) 식민지 정부는 완조의 정책을 답습하여 프랑스와 중국 간에 ‘중국계이민’의 국적문제가 발생하자, 명향의 신분은 ‘베트남인’과 ‘아시아외국인(중국계이민)’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이처럼 명향(明鄕)은 명향사에서 나온 말로 이들 중국계이민의 자손을 말하거나, 중국계이민 남성과 현지에서 베트남인 혹은 크메르인(캄보디아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의 자식을 가리킬 때도 있다. 명향은 베트남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하는 54개 민족 가운데 화족(華族)이 아닌 베트족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현지사회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시 명향사의 조직은 해체되었고, 사(社)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등의 재산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최근 호이안의 명향과 화교 관련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명향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조선의 ‘황조유민’과 베트남의 명향 사이에는 몇가지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황조유민’은 조선 왕조의 정책에 따라 보호받기는 했지만, 명향처럼 베트남 남부의 개발과 같은 경제활동에 적극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명향은 출신지 별로 방회(幇會)를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동향단체를 만들었지만 ‘황조유민’에게는 이러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명향은 프랑스통치시기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황조유민’은 일제강점기에 그러한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되어 버렸다. 명향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향회관, 관제묘와 같은 시설이 존재한 반면, ‘황조유민’에게는 이러한 공동체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 양자 간에는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
그림 2. 호이안 관제묘 소재 1653년호의 칙봉(勅封) 액자(Nguyen Thi Thanh Ha(2017), 287쪽)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Nguyen Thi Thanh Ha(2017), 「ベトナムにおける‘明鄕’の家譜と社會組織に關する人類學的硏究: クアンナム省・ホイアンの事例から」, 廣島大學博士學位論文.
華僑華人の事典編纂委員會 編(2017), 『華僑華人の事典』, 丸善出版.
禹景燮(2016.8), 「조선 후기 ‘皇朝遺民’의 삶과 정체성」, 『제4회한중역사가포럼: 이주와 이산, 다문화의 역사를 통해 본 한중관계』, 국사편찬위원회·북경대학한국학연구중심 주최 국제심포지엄 논문집.
劉春蘭(2016.8), 「明淸交替期漢族的朝鮮移民硏究」, 『제4회한중역사가포럼: 이주와 이산, 다문
화의 역사를 통해 본 한중관계』, 국사편찬위원회·북경대학한국학연구중심 주최 국제심포지엄 논문집.
張燁(2019), 「越南中南部明鄉人的演變研究」, 雲南師範大學碩士學位論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