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머지않아 유럽 전역과 동아시아 등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다. 철도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이자 이를 추동하는 견인차였다. 철도는 유럽을 넘어 한국과 동아시아 등 세계 각지로 파급되었다. 철도 지식의 전래와 기차의 출현, 그리고 탑승 경험은 한국인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인들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화마, 화륜차, 불수레, 쇠송아지 등으로 불리며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기계문명의 상징물이었다.
기차만큼 매혹적으로 근대와 서구문명을 증험하는 이기도 없었다. 기차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고 일정한 속도로 내달리며, 지역과 지역을 동일한 시간 규범 속으로 묶었다.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이다. 기차는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운행되었으며,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였다. “19세기에 어느 것도 기차만큼 생생하고 극적인 근대성의 징표는 없었다”라고 회자될 정도로, 기차는 도시와 농촌,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며 인간의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기차에 탑승한 사람은 1876년 조선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였다. 김기수는 44세 되던 해인 1875년(고종 1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응교(應敎), 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고 다음해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자 예조참의의 신분으로 수신사에 임명되어, 74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일본으로서는 112년만에 맞이하는 조선사절이었다. 김기수의 임무는 일본의 물정을 정확하게 탐지하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그의 행적은 귀국 후 자신이 작성한 <일동기유>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림 1. 일동기유
1876년 음력 4월 29일 김기수 일행은 부산에서 일본증기선 ‘황룡환’에 몸을 싣고 1876년 5월 7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하였다. 조선시대 조선통신사가 3개월 걸려 당도하던 거리를 증기선과 증기기관차를 타고 불과 일주일만에 도착한 것이다. 사절단은 악대를 선두로 요코하마역으로 향하였다. 이미 4년 전인 1872년에 일본 최초로 개통된 요코하마-도쿄 신바시 노선을 왕래하는 기차에 탑승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사절의 행렬 모습을 담은 그림이 영국의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렸는데, 여기에는 조선사절의 복장과 행렬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사진 속에 김기수를 비롯하여 가마를 탄 고관들은 하나같이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수행원 중에 안경을 쓴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동경일일신문>은 “조선의 풍속에 안경이 존비를 구별하는 표식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 같이 안경을 쓴 것은 기인한 일”이라고 보도하였다. 사실 필자 역시 중학교 1학년 때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안경을 맞추어야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어른도 안경을 쓰지 않는데 애들이 무슨 안경이냐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는 안경이 존비의 기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요코하마역에서 당도한 김기수 일행은 곧 기차와 마주하였다. 김기수는 “기차가 역루 앞에서 기다린다고 하기에 역루 밖에서 복도를 따라 수십 칸을 다 지났는데도 기차가 보이지 않는다. 긴 행랑이 길가에 있기에 기차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것이 바로 기차라 하였다. 조금 전에 긴 행랑이라 생각했던 것이 기차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김기수는 기차를 자세히 관찰한 후 기행문에서 “양쪽 가에 수레바퀴 닿는 곳은 편철을 깔았는데, 그 모양이 밖은 들리고 안은 굽어서 수레바퀴가 밟고 지나가도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화륜이 한 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는데, 천둥 번개처럼 달리고 비바람처럼 날뛰어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리는데도 차제는 안온하여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다만 좌우의 산천, 초목, 옥택, 인물만이 앞뒤에서 번쩍번쩍하므로 도저히 걷잡을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였다.
1883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하였으며, 귀국 시에도 대륙횡단열차를 이용한 까닭에 철도의 속도와 편의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박정양은 자신이 저술한 <미행일기>에서 미국인들은 국민의 편리를 위한 일에 힘쓰기 때문에 철도와 도로가 전국에 걸쳐 부설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차, 전차, 자동차 등이 값싸고 신속하다고 기술하였다.
박정양은 주미전권공사로 근무하면서 미국의 실상을 목도하고 남긴 견문기 <미속습유>에서 전차와 관련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그는 “현재 날로 발전하여 항구와 도, 부 안의 도로에 이르기까지 철도를 설치하니, 이것이 바로 전차이다. 한 차에 수십 명을 태울 수 있으며,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 한 번 타는데 단지 5전만을 낸다. 오가기가 매우 편리하며 언제나 문을 나서기만 하면 탈 수 있는 까닭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다”라고 기록하였다.
유길준은 1856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1873년 박규수의 제자로 들어가 일찍이 서양문명에 눈을 뜨게 되었다. 민영익의 천거로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유길준은 유학생 신분으로 수학한 이후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행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미국에 머물려 수학하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구미를 둘러본 경험을 기록한 <서유견문>을 남겼다.
유길준은 기차에 탑승한 경험을 “한 번 움직이면 몇 분의 촌각 안에 수십 리의 길을 가는 것이 신마보다 빠르고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아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증기차의 속도는 화륜선에 비할 바 없이 빠르며, 규모와 편리함이 놀랍고 신기하다. 기차에 한 번 타기만 하면 차창 밖의 풍경이 아름답게 보이고, 마치 바람을 타거나 구름에 솟은 듯한 황홀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라고 탄식하였다. 또한 “철도는 평평하고 곧아야 하기 때문에 남의 논밭이나 삼림에 관계치 않고 길을 닦게 된다. 철도회사가 그 주인과 상의하여 시행하지만, 그 값을 절충하는 방법은 공평한 사람의 중립적인 결정에 따른다. 만일 주인이 불응하면 회사가 법원에 소송을 걸어 법관의 판결에 따른다. 철도는 대중에 이익을 주며 나라에 부강과 번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법관도 반드시 회사의 청구를 허락해 준다”고 기록하였다.
미국 대륙횡단철도에 대해, “기차는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서 움직이는 차로서, 화륜차라고도 한다. 멀리 가는 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차 안에다 침구를 갖춰 놓았는데, 낮에는 걷어서 차벽에 걸어두고, 밤에는 내려서 평상처럼 된 상하 2층의 침대를 만든다. 또 음식차가 있어서 하루 세 끼를 제공하고, 세면실과 변소의 위치도 조리있게 배치되어 매우 편리하다. 철도와 차바퀴가 서로 맞물려 달리니, 만 리 밖까지 이르러도 한 치의 오차가 없다"라고 기록하였다.
1887년 6월 주미공사로 임명된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미국 체류 중 기차를 타보고 그 편리함과 신기함에 감탄한 나머지 귀국할 때 쇠로 정교하게 만든 기차와 철도 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철도의 효용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철도 부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하영이 가져온 기차와 철도 모형은 폭이 18-20센티미터, 높이가 25-30센티미터 정도로, 기관차·객차·화물차를 연결해 레일 위로 달리는 장난감 모형이었다.
조선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도 1876년 일본육군성 산하의 ‘정조국’에서 증기기관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목도하고서는, “기교가 이럴 수 있겠는가! 한 개의 화륜(증기기관)으로서 천하의 능사를 다 만들게 되니,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괴이이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김기수는 전통적인 사상과 관념 속에서 서양의 이기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김기수는 요코하마에서 도쿄 신바시 사이의 기차를 타고 나서 “장담배 한 대를 피울 사이에 벌써 신바시에 도착하니, 곧 90리 길을 온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 이 대목은 근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근대라는 압도적 힘으로 향후 한일관계에 드리울 어두운 그림자를 어렴풋이 예측한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문화오디세이 2】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