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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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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기 딸의 상속 _ 손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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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황제”, “소공주1980년대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태어난 아이들로, 모든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한 세대를 일컫는다. 전통적으로는 아들을 더 귀하게 여겼지만, 이미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도 희박해졌고 자녀를 하나밖에 둘 수 없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무뚝뚝한 아들보다는 살가운 딸을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지금은 두 자녀까지 낳을 수 있게 되었지만 중국도 교육, 환경 등의 문제로 더는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따라서 부모는 아들이 아닌 외동딸에게도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을 테고, 그들이 세상을 등질 때는 자신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모두 딸에게 상속할 것이다. 아들들만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고 못 박았던 수천 년간의 전통법은 사라졌고, “상속권은 남녀가 평등함을 이미 법률로서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상속사의 긴 과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근대 이후의 변화는 실로 획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통시기에 딸은 부모에게 아무런 재산도 상속받지 못했던 것일까?

 

상속이라는 말은 서구사회에서 유래된 것으로, 피상속인의 사망을 계기로 그의 개인 재산이 자녀 등에게 이전되는 행위를 말한다. 전통시기 중국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슷한 의미로 분가(分家)”라는 말이 이를 대신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분가할 때 동시에 재산도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가의 원칙은 형제균분”, 즉 아들들에게 동일한 분량의 재산을 분배한다는 것이었을 뿐, 딸은 제외가 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재산분할이 부친의 대를 잇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딸이 여기에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물론 딸도 여러 이유로 부친의 재산을 받기는 했지만 적어도 분가형제균분이라는 명목의 정규 상속은 받지 못했다. 이는 오랫동안 민간의 관습으로 전해 내려오다 당대(唐代)부터 국가법 속에 편입된 규정이었다.

 

그렇다고 딸이 전혀 부모의 재산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들이 받는 재산과 딸이 받는 재산은 의미가 달랐다. 딸이 부모에게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재산은 혼인할 때 받는 혼수였다. 혼수는 곧 혼인비용을 말하는데, 이 혼인비용은 딸뿐만이 아니라 아들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밀히 말해서 혼수는 형제균분의 재산분할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딸은 아들이 받을 수 있는 혼인비용의 반 정도를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양자는 명칭도 달라 아들의 혼인비용은 빙재(聘財)라고 하여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딸의 혼인비용은 혼수(粧奩)로 불렸다. 혼수에는 신부가 시가에 들어가서 사용할 일용 의복, 장신구, 토지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렇게 분배된 혼수는 시가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신부가 가져온 혼수는 이후 재산분할 할 때에도 분할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중국 전통사회에서 재산은 가족 공동의 것으로 개인 재산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혼수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여성의 사적 소유권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다만 혼인 후 혼수는 남편과의 공동재산으로 편입되어 가장인 남편이 아내 대신 혼수에 대한 처분권이나 사용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또한 혼수는 대체로 남편이나 아들의 사업 자금 혹은 집안의 대소사에 비용을 보태거나, 자녀의 학비 지원, 종교생활, 자선활동 등에서 사용되었다. 즉 아내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기보다는 가정을 위해 사용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권은 당사자인 아내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상의 가정 대소사에 돈을 내놓기를 거부한다면 남편도 어쩔 수는 없었다. 아무튼 혼수는 딸이 친정에서 받는 개인 재산이었다.

 

이러한 혼수 외에도 딸이 친정의 재산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또 있었다. 친정에 아들이 없어 딸의 아들 즉 외손자로 대를 잇고자 할 때, 혹은 딸의 형제에게 아들이 없어 딸의 아들로 외삼촌의 대를 잇게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딸의 아들을 친정의 후사로 세울 경우 딸은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그 재산을 관리함으로써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재산소유권이 아니라 재산관리권이었고,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면 딸의 이러한 권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아들이 성장하기까지 한시적이나마 딸은 재산관리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딸을 통해 데릴사위(贅婿)를 들이는 것도 딸이 간접적이나마 재산분할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밖에도 형제균분은 아니지만 가정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딸에게도 예외적으로 재산분할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딸이 받을 수 있는 상속의 분량은 형제균분의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모와의 친밀한 정도에 따라 정해졌다. 이는 균분(均分)”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작분(酌分)”이라 불렸다. 그 의미는 참작해서 분배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균분과 작분의 결정적인 차이는, 아들들에게는 가산 속에 이미 자신의 몫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재산분할의 권리가 있었지만 딸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은 부친에게 분가와 재산분할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딸은 부친이 주는 대로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작분의 분량은 부모가 정하는 것이고 일정한 표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특별하게 총애하는 딸이라면 참작의 분량이 많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한정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들들에게 균분하는 액수보다는 적어야 했다.

 

다만, 특별하게도 남송시기 강남지역에서 딸이 아들의 반을 분배받는 반분법(半分法)이 제정되었던 적이 있었다. 혼수도 아니고 친정의 후계자를 삼은 것도 아니고 데릴사위를 들인 것도 아닌데, 딸에게 아들 몫의 반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이 여자 반분법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지역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행해졌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 그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이 여자 반분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는 일본의 법사학자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이다. 그는 남송시기 여성의 지위가 역대 어느 왕조보다 높았는데 여자 반분법은 그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딸에게도 정규 상속을 한다는 이러한 법 규정은 중국의 남방지역뿐 아니라 조선(고려),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민족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이는 남방지역의 관습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학자는 시가 슈우조(滋賀秀三), 남송시기 일부지역에서 반분법이 행해졌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국 전통시기를 가로지르는 종조계승(宗祧繼承: 대를 잇는)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남송시기 강남의 일부 지역에서 한정적으로 행해졌던 특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남송시기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전통시기 여성이 정규적인 상속에서 제외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당시 이미 법제화된 민간의 습속으로서 왕조의 교체나 통치사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2천 년 동안 지속적인 생명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남녀평등을 내세운 중화민국시기와 사회주의 집체경제시기 조차도 당시의 법 규정과는 상관없이 민간에서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는 어떤가. 현재 중국은 딸도 아들과 동일하게 부모의 개인 재산을 물려받는 근대적인 상속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농촌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여성을 제외하는 이러한 상속방식이 현재 농촌의 일부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현지조사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속과 관련하여 깊이 내재되어 있는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대한 보다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검토가 필요한 이유이다.


【관습과 중국문화 24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201911월12일자 국민일보(인터넷판) 칼럼 [차이나로그인]에 실린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필자가 촬영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