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여름의 만주 기행에서 두만강은 좀 특별한 존재였다. 여러 군데에서 두만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강의 여러 모습을 강가에서, 강물의 한 복판에서, 다리 위에서, 또 높은 조망대 위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같이 나이가 좀 든 세대들은 예전에 가수 김정구 선생이 부른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으로 시작되는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에 친숙하다. 어찌 보면 두만강이라는 이미지는 저와 같은 눈물, 애환, 이별, 슬픔, 통곡, 분노 등으로 채워진 슬픔과 원한의 강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 이 노래의 배후에는 독립운동가를 잃은 아내의 통곡을 도문 나루터에서 들은 작곡가가 그 사정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던 터라서 그 비극의 실체도 노래를 통해 잘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들의 두만강 기행은 용정에서 출발하여 삼합진에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을 구경한 뒤 다시 연길로 돌아온 다음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도문시로 향하였다. 도문시를 둘러본 다음에는 계속 두만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렸는데,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조선, 중국, 러시아의 국경이 교차하는 방천이었다. 그곳에서는 오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림 1. 중국의 삼합진에서 본 북한의 회령시. 언덕 아래에 두만강이 흐른다.
여정의 출발지인 용정은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동네이다. 특히 윤동주 생가가 용정에 있기 때문에 연길에 가는 한국의 여행객들에게는 필수적인 코스다. 또 이곳은 한반도를 떠나 북간도로 나아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예전으로 치면 만주 진출의 교두보 정도로 보아도 좋다. 용정에서 한 시간 정도 버스를 이용하여 산과 들을 따라 동남쪽으로 50여킬로를 달려가서 이른 곳이 삼합진이었다. 두만강에 걸쳐있는 여러 개의 조·중 국경 관문의 하나로서 진이라는 행정단위의 명칭이 붙은 것처럼 인구가 5000여명을 헤아리는 작은 읍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중국땅이지만 주민의 90% 이상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보면 이 읍의 역사나 행정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전망대에 오르니 언덕 아래로 두만강이 흐르고 그 너머 멀리 북한의 회령시가 보였다. 깔끔한 이미지이다.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개천의 하류에서는 북한인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탓인지 연변이나 용정에도 회령 출신들이 의외로 많았다. 연변 일대의 발해산성을 안내하던 조선족 한 분은 회령이 고향이라고 하였다.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변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한다. 고모 등 일가친척이 아직도 회령에 살고 있지만, 최근에는 경계가 삼엄하여 가기 어렵다고 한다. 그 말을 증명하듯 중국측 강변에는 철조망이 이어져 있었다. 최근의 작업이라고 한다. 부드러운 국경이 어느새 삼엄한 철조망의 국경으로 바뀐 셈이다.
이곳에서 구경을 마치고 다시 연길로 돌아와 두만강 하류에 있는 도문을 방문하였다. 도문시는 두만강 중류에 있는 국경도시로서 인구는 약 15만 여명이니 소도시치고는 조금 큰 편에 속한다. 그만큼 무역과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두만강변에 있는 도문 광장을 거쳐 조·중 북경선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남녀노소 일행이 광장을 오가며 사진을 찍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사연을 물어보니, 어머니 7순 잔치라서 이곳으로 나왔단다. 좀 있으면 점심을 먹으러 시내의 식당으로 갈 텐데, 그곳으로 오라고 권한다. 식당 이름까지 가르쳐 준다. 초청은 고마웠지만 그저 사진만 같이 찍고 축하의 인사말을 해주는 것으로 잠깐의 인연을 맺었다. 이런 일행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지만 서울 한복판의 패션과 잔치 분위기가 두만강가의 도시에서도 금세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양측의 문화 교류가 의외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림 2. 도문시 광장에서 만난 조선족 일행.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기념하기 위해 가족들이 나들이를 나왔단다. 뒤쪽에 두만강이 흐른다.
도문시에서는 두만강을 유람하는 선상관광이 있었고, 도문교 상판에 그어져 있는 조·중 국경선도 밟아볼 수 있었다. 선상에서 만져본 두만강물은 깨끗하였으나 강하게 흘렀다. 수량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도문교를 걸을 때 북한인 두 명이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출국수속을 마친 뒤 다리 저편의 북한 땅 남양으로 걸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그 아련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도문시는 그 점에서 두만강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도시였다고 생각된다.
도문에서 방천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두만강을 따라가는 멋진 여정이었다. 이 여정에서 두만강이 안고 있는 천연의 속성을 볼 수 있었다. 곧 끝없이 이어지는 사구와 개발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자연풍경이 그것이었다.
그림 3. 두만강 하류에 끝없이 펼쳐진 사구. 흐르는 강물이 모래언덕에 막혀 호수로 변한 곳도 있었다.
사구 혹은 사주로 불리는 모래언덕은 두만강 하류 쪽으로 갈수록 넓고 많았다. 강물에 의해 퇴적된 모래가 바람에 날려 하안의 양쪽 언덕에 쌓인 결과라고 하는데, 하류 쪽에는 모래언덕에 막혀버린 강물이 호수로 변한 곳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두만강 하구는 사실상 사구와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이 일대의 두만강은 말 그대로 천연 형태의 강이었다. 조선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철교 이외에는 인공시설물을 보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는 방천을 자연경관지구로 지정해 놓았다. 방천이란 지명 역시 사구 사이에 둑을 만들어 길을 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림 4. 방천 전망대에서 바라본 두만강 하구 일대. 중간의 흰색 건물의 왼쪽이 러시아땅, 눈앞의 숲은 중국땅, 두만강 건너 오른쪽은 조선땅이다. 조선에서 러시아로 가는 길은 두만강을 가로질러 만든 철로이다. 왼쪽의 호수는 사구로 인해 만들어진 일종의 석호이다.
훈춘은 조선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최동단 도시이다. 훈춘은 만주어로 변경이란 뜻이라고 한다. 방천의 어느 공중변소에 가니 중국어, 한글, 그리고 러시아어로 주의사항을 써 놓은 것이 있었다. 함경북도 라선 특별시의 두만강역을 지난 철로는 넓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핫산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훈춘 일대의 국경상황, 자연지리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 오기 전에는 훈춘을 아주 조그만 면적의 소읍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청말 광서(1875-1908) 시기에 이곳에서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한 오대징(1835-1902)의 동상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오대징은 우리에게 갑신정변 때 조선에 파견된 청군을 이끌고 들어온 관료로 또 고문자를 고증한 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1880년대 후반에 훈춘에 가서 러시아와 협상하여 두만강 하구의 통행권, 곧 출해권(出海權)을 확보한 애국자로 더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오대징의 동상이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조·중 세관인 권하(圈河)가 있었다. 두만강 하류에서 삼합, 도문, 그리고 권하 이렇게 세 군데의 세관을 보았는데, 그들 세관 중 규모가 가장 크지 않을까 라고 짐작하였다. 규모도 그렇거니와 관련 건물이나 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죽 늘어서서 통관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관을 건너면 저 유명한 아오지에 도착한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인물은 아오지탄광으로 보낸다고 배웠는데, 그 아오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보면 극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두만강쪽에서는 바로 손에 닿을 거리에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23】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