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악기 중에 해금이 있다. 깽깽 소리가 난다 하여 민간에서는 깡깡이, 깽깽이 등으로 불려왔다. 김홍도의 민화인 ‘무동’에서 보이듯이 악단 연주에서 해금은 빠지지 않는 악기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해금이 발신하는 심금을 울리는 소리에 매료되어 왔다.
중국에 해금과 비슷한 악기로 이호(二胡)가 있다. 명칭으로 보자면 현이 두 줄이라 이(二),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 페르시아로부터 전래되어 왔다고 하여 오랑캐 호(胡)자를 붙여 이호(얼후)라 한다. 동양의 전통악기는 칠현금, 거문고, 가야금, 고도 등 농경민족이 애호해 왔던 악기와 말 위에서 이동하면서도 연주할 수 있는 이호, 고호, 해금 등 유목민족들이 애호해 왔던 악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호는 중국 민간에서 가장 보급률이 높고 사랑받는 악기라 할 수 있다. 두 줄로 내는 소리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의 운지와 줄을 당기는 강약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조절되어 음역이 매우 넓은 전통악기이다. 제작법 또한 단순하고 가격도 저렴하여 보급률이 가장 높은 악기이며, 사람의 음색과 가장 가깝다 하여 중국식 바이올린이라는 예명을 가지고 있다.
이호와 외형상 많이 닮은 악기가 해금이다. 가녀린 두 줄로 음역이 넓으며 풍부한 소리를 낸다. 요즘 백화점 등 문화센터에서 빠지지 않는 악기 강습으로 해금이 유행이라고 한다. 해금은 우리의 전통악기이지만 실상 중국 해족이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악기를 개량하여 만든 악기이다.
그림 1. 서로 닮은 해금(좌)과 이호(우)
요즈음 티비 연속극 등의 배경 음악으로 유행하는 곡 가운데 해금으로 연주하는 ‘Small Flowers near by the Railroad’가 있다. 창작국악이라 오래된 연주곡은 아니지만 듣는 이를 매료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다. 필자는 간혹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반응을 묻곤 한다. 요즘 신세대 음악과는 사뭇 달라 처음에는 어색해 하다가도 곧 해금으로 연주되는 선율에 매료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이 곡은 해금 연주로 손꼽히는 ‘꽃별’이 직접 곡을 만들어 연주한 것이다.
노래 제목을 굳이 번역하자면 ‘철길 가에 피어난 작은 꽃들’이 되겠다. 철길 가에 피어난 꽃은 대체 어떤 꽃일까? 꽃별에게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마도 망초, 개망초일 가능성이 크다. 망초는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핑크 플리베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꽃이다. 구한말 이전에 조선에는 이 꽃이 한 포기도 없었다. 말하자면 구한말 전래되어 우리 국토에 뿌리내린 꽃이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조금만 땅을 묵혀두면 여지없이 흰 망초꽃으로 뒤덮히고 만다. 농촌에서는 이 꽃을 없애려 제초제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생명력이 끈질겨 이내 다시 살아나곤 한다. 무덤가에도, 해변가에도 조금이라도 빈 터가 있으면 어느새 뿌리내린다.
이렇듯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꽃이 한국에 들어와 망할 망(亡)의 망초가 되었으니, 꽃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억울하랴. 아다시피 구한말 우리나라에서 철도를 부설한 주체는 일본이었다. 처음 경인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상당량의 레일과 침목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구한말 조선 팔도에 민둥산이 적지 않았으며, 연료 부족으로 민가에서는 산의 낙엽까지 남김없이 긁어 가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침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령이 오래되고 둥치 굵은 나무를 구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들여오자니 거기도 나무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나무가 많고 가격이 저렴한 북아메리카로 눈을 돌려 결국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침목용 목재를 수입하였던 것이다.
그림 2. 핑크 플리베인(개망초)
이 때 나무에 묻어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 핑크 플리베인이라는 꽃이다. 근대 이후 한 지역에서 돌림병이 발생하면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 노선을 통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지곤 하였다. 이에 정부는 종종 철도역을 폐쇄하기도 하고 열차의 운행을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역대 정부는 위생정책을 시행하면서 철도를 통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꽃도 마찬가지 이치로 일단 들어오자 지역과 염치를 가리지 않고 철도 노선를 통해 사방 팔방으로 씨를 퍼뜨렸다. 초대받지 않은 꽃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자신의 존재를 거리낌 없이 과시한 것이다.
1906년 경의선이 개통된 해에 신문은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에는 빈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으며,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라고 탄식하였다. 경부선과 경의선이 부설되면서 약 2,000만 평의 토지가 철도부지로 수용되었으며, 연인원 1억 명이 부설 노동자로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구한말 의료 선교사로 활동한 닥터 홀은 초기 조선의 전차를 회상하면서, 근대나 철도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지가 문명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하였다. 홀은 “한때 전차는 조선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으며 서양 마귀의 발명품으로 지탄받았다. 전차가 처음 운행되었을 때 운이 나쁘게도 오랜 가뭄이 지속되었다. 점술인들은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가 전차 때문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전차에 대한 적개심이 커져 갔다”라고 회상하였다.
1899년 홍릉까지 전차가 개통된 이후 사고로 목숨을 잃는 자가 적지 않았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명성황후의 묘가 있는 홍릉까지 자주 행차하였던 고종이 교통의 편의를 위해 전차를 개통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전차의 속도가 빨라 치어 죽는 아이가 하루에도 여러 명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홀은 조선인들이 전차길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목침 정도로 여겨 차가 다니지 않는 늦은 밤에 베고 잠들곤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899년 여름 이른 아침에 첫 전차가 짙은 안개로 사람들이 철도 침목을 베고 잠든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이들의 목이 잘려 나가는 참사가 발생했다. 해가 뗘오르자 군중들은 승무원을 공격하고 전차까지 전복시킨 후 불을 질렀다. 홀은 전차에 대한 무지가 적개심의 주요한 원인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자도 기차에 대한 조선인의 무지에 대해 기술하였다. “연속되는 가뭄으로 고통받게 되자 기관차의 연기가 하늘을 말려 빚어진 일이라 여겼다. 또한 산을 헐고 깍아 길을 내니 산신을 화나게 했고, 결국 가뭄이 초래된 것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경부선 철도 공사를 하면서 레일을 부설하기 위해 수많은 가옥을 철거하고 분묘를 파내었으며, 분묘 1기당 3원씩 지급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 백성을 고용하여 후한 값을 주었으나, 게으름을 피우고 힘을 쓰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때려 죽여 구덩이에 처박고 흙을 메워 평평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인부를 모집하면 찾아오는 자가 적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철도를 부설하는 주체인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원한의 골이 나날이 깊어갔다.
일본이 경부선을 부설하기 위해 수용한 토지는 한국정부가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민간인 소유지를 헐값에 사들여 일본에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군이 직접 부설한 경의선 철도 부지 역시 일본군이 저렴한 가격에 강탈하다시피 수용하였다. 따라서 가옥과 분묘를 헐값에 빼앗긴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철도를 부설하면서 노동자의 동원과 강도 높은 사역으로 일본과 철도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감이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철도를 문명의 이기보다는 침략과 수탈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러한 원망이 반철도, 항일투쟁으로 폭발하자, 일본은 군경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애꿎은 핑크플리베인이 망초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모든 원망을 스스로 안고 피고 지며 많은 세월을 지내 왔다. 지금도 이름 모를 들녘에서 개망초는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진다.
【관습과 중국문화 23】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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