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상속’이란 ‘피상속인의 모든 권리와 의무가 상속인에게 포괄적으로 이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중국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중국의 상속은 법정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피상속인의 유언을 통해서도 상속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속 방식은 서구의 영향으로 근대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시기의 상속은 어떠했을까.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제비뽑기’와 ‘상속’은 도무지 서로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두 단어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을 중국의 전통시기에 적용을 시켜본다면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 전통시기에는 형제균분의 원칙에 따라 상속인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자신이 받을 몫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가족법의 핵심은 혼인과 상속에 관한 것이다. 전통시기 상속에 관한 법은 주로 혼인과 호적에 관련된 호혼률(戶婚律)에 규정되어 있었다. 전통시기에도 혼인법은 국가 사회의 기본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법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러나 상속은 개별 가정의 일로 사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기본원칙은 있었지만 국가가 과도하게 간섭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역대 어느 왕조든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해 토지에 대한 철저한 조세제도를 실시했던 데 비해, 상속에 대해서는 과세를 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 어떤 식으로 상속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전통사회에서도 재산에 관련된 일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기 쉬웠을 터인데 상속은 어떻게 해서 그 공정성과 합법성을 확보했던 것일까.
현재 중국에서는 상속을 의미하는 용어로 ‘계승(繼承)’이 사용된다. 그런데 이 용어 자체는 근대에 와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통시기 중국의 상속에 해당하는 행위 언어는 ‘분가(分家)’였다. ‘분가’는 자녀가 결혼한 후 부모의 집을 떠나 독립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분가와 다르지 않다. 다만 전통시기 중국에서 분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분가와 동시에 아들들이 재산을 분할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세대의 재산이 아들세대로 전이된다는 점에서 분가는 법적으로 상속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 재산분할의 의미는 아들세대가 독립적인 가정을 꾸려나가도록 경제적인 기초를 마련해 준다는 데 있었다. 다만 서구의 상속과 중국의 분가는 다른 부분이 존재했다.
서구의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시작되지만, 중국의 분가는 피상속인의 사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즉 분가는 부친 생전에 하기도 하고 부친 사후에 하기도 했다. 또한 서구의 상속이 로마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던 데 비해, 중국의 상속은 전통적인 분가제도에서 유래했다. 분가제도는 전국시대 진나라 상앙이 “백성이 한 집에 남자가 두 명 이상 있는데도 분가를 하지 않으면 그 세금을 두 배로 물린다”고 했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분가는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중국의 전통사회는 4대, 5대가 함께 모여 사는 대가족사회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중국의 가족형태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의 5-6명으로 구성된 소농가정이 대부분이었다. 분가를 통해 끊임없이 세대가 독립했기 때문이다.
분가를 하게 되는 계기는 주로 집안 내 사정 때문이었다. 가장이 연로하여 대가족을 꾸려나갈 수 없기 때문이거나 형제 가족이나 부모세대와의 갈등, 불화, 혹은 그런 염려가 분가를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들들이 각각 결혼을 하여 식구들이 많아지면 서로 간에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아들들이 결혼하거나 아기를 낳게 되면서 분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분가는 주로 관습에 의해 행해지다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당대(唐代)부터는 국가법으로 흡수되어 명문화되었다.
그런데 분가와 동시에 행해졌던 재산분할에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었다. 바로 형제균분이었다. 딸은 재산분할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들 간에 분할되었고, 아들간에는 균분이 원칙이었다. 만일 균분이 행해지지 않으면 분가 당사자들이 동의하지 않았고 그것이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유언을 통해서 피상속인의 의중을 담아 분할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장이 임의로 상속분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균분의 원칙하에 분가 당사자들이 어느 정도 수긍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가장은 로마의 가장처럼 자녀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등의 절대적인 가부장권을 갖지는 못했다. 따라서 ‘형제균분’이라는 추상같은 국가법이 있는 한 재산분할이 각 가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를 피하기 어려웠고, 이 법을 준수함으로써 재산분할의 공정성과 합법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균등분할이 가능했느냐는 것이다. 재산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제가 없었던 전통시기에 균분을 한다는 것은 분명 용이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의 합리적인 장치가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그 첫 조치가 바로 ‘재산평가’였다, 당시의 용어로는 ‘품탑(品搭)’이라고 하는데, 품탑이란 가산을 분할할 때 피상속인의 채무를 포함하여 재산을 평가하고 상속받는 사람의 수대로 나누는 과정을 말한다. 토지의 경우 토질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동산도 가치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각 품목의 재산 가치를 따져 알맞게 조합하여 비슷한 분량으로 나누는 것이다. 토지의 비옥도, 질량 등 물리적 차이 외에도 재산분할 주체와 재산을 받는 아들들 간의 친소관계와 이에 따른 개인적인 정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산의 분할이 균등하지 않게 되면 장래에 분쟁의 소지가 될 뿐 아니라 법으로도 금지된 일이었다. 따라서 각 가정에서는 일차적으로 균분에 노력하고 나중에 발생할 수도 있는 분쟁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품탑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형제균분을 위한 두 번째 조치는 ‘제비뽑기(拈鬮)’였다. 품탑이 완료되면 상속받을 아들들은 제비뽑기 방식을 통해 자신의 몫을 확정하고 그에 대한 재산 명세서를 받는다. 제비뽑기의 방법은 아테네 등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공직자를 선출할 때 사용했다고도 하고 지금도 태국에서는 군대에 갈 사람을 뽑을 때 사용한다고 하니,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정한 방법의 대명사인 모양이다. 당시 사람들도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재산분할을 하는 것을 가장 공평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형제균분의 중요한 수단은 ‘제비뽑기’였다. 최소한 가장이나 존장(尊長)이 임의로 재산을 분할하는 것은 드물었을 뿐 아니라 법으로도 금지된 일이었다. 워낙에 넓은 땅을 가진 중국이고 보면 어느 한 지역 혹은 어떤 가정에서 가장이 임의로 분할한 사례를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리도 없다. 그러나 형제균분의 원칙이 국가법에 명시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습으로 자리 잡고있는 한, 가장이 임의로 분할을 한다면 아무리 효심 가득한 아들이라도 이를 수긍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1. 제비뽑기의 방법은 여러 방면에서 사용되었던 듯하다. 위 그림은 사윗감을 택하는 과정에서 제비뽑기를 하는 모습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분할이 ‘절대적인 균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품탑으로 나누어진 재산에 대해 상속자들이 ‘수긍’하면 그것으로 균등분할이라고 인정되었다. 혹시 약간의 불균등이 발견된다 해도 제비뽑기를 통해 이미 자신의 몫이 정해졌고, 그 후에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서명까지 한 터라면 번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재산분할에서 이러한 원칙은 대체로 잘 준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 화북지역 농촌 관행 조사에서도 재산분할에서 품탑과 제비뽑기가 보편적으로 행해졌으며 이외의 다른 분할 방법은 없다고 보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북지역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분서(分書: 재산분할 문서)의 내용을 보아도 품탑과 제비뽑기는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2. 이 문서는 1762년 산서성의 王國宰 등이 작성한 분서로, 재산분할 과정에서 품탑과 제비뽑기가 행해졌음을 명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품탑과 제비뽑기를 통해 각자의 몫이 정해지면 가장의 동의를 얻어 친지들을 대청에 모아놓고 분가의식을 치른다. 여기에 분가 과정의 공정성, 투명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반드시 친족을 참여시켜 중개인, 보증인 등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분가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동의는 곧 이 재산분할이 합법적이라는 증거였다. 따라서 분서를 작성하여 분가 당사자들이 서명하고 친척들이 증인으로서 서명하면 이 분가는 합법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법적인 효력이 발생했다. 즉 법은 형제균분이라는 대원칙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과 절차는 민간에서 행해졌던 품탑, 제비뽑기, 분가의식 등의 관습에 의해 공정성과 합법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전통시기 중국인의 일상에서 ‘법’보다 가까웠던 것은 오래된 일상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관습과 중국문화 22】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손승희, 『중국의 가정, 민간계약문서로 엿보다: 분가와 상속』, 학고방, 2018의 일부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http://www.redocn.com/
그림 2.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