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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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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베란다를 소유하는가 – 5피트 공간의 발견과 Verandah Riot (1) _ 김종호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동남아시아는 명백히 네덜란드의 세기였다. VOC로도 잘 알려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Dutch East India Company)17세기 초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거의 200여 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향신료 및 각종 1차 산품의 동서 장거리 교역을 장악하였다. 같은 시기 영국은 네덜란드의 기세에 밀려 동남아시아에는 거의 진출하지 못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의 경우 진출 초기 1611년에서 1620년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격렬히 경쟁했으나 1623암본섬 학살(Ambonya Massacre)’를 계기로 동남아시아를 거의 포기하게 된다. 이때 영국이 눈을 돌린 곳이 거대한 남아시아 대륙이었는데, 영국은 1639년 마드라스(Madras) 지역의 군주와 협약을 맺고 요새건설과 무역의 특권을 약속받아 본격적으로 인도에 진출하였다.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영국 동인도회사가 동남아시아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 인도에서의 지배가 확립되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력 및 경제규모에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을 명백히 앞질렀을 즈음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믈라카를 제외하고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그리 큰 관심을 받지 않고 있던 말레이 반도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주요 항구도시들을 중심으로 내륙을 공략하였다. 1786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재정부족과 부기스인(Bugis, 말레이인의 한 갈래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역내 해상민족) 및 시암왕국(Siam 현재의 태국)의 위협에 시달리던 말레이반도 북부 끄다(Kedah) 지역 술탄에게 무력을 이용한 보호를 미끼로 페낭섬(Penang)을 구입하였다. 이후 페낭은 영국의 보호 아래 서구와 인도의 상품들을 주석, 후추, 고무, 향신료 등으로 교환하는 거대항구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1819년 동인도회사의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말레이반도 끝에 붙어 있는 섬을 발견하고 영국의 대아시아 지역전략의 핵으로 삼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바로 동남아시아 영국 식민지의 핵심, 싱가포르의 시작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싱가포르는 말레이 반도 끝에 위치하여 믈라카 해협을 건너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천혜의 항구가 설치되어 있어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과 금융을 중개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있었다. 특히 1840년대 영국이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할양받고 상해에 조계지를 설치하면서 상해-홍콩-싱가포르-인도-런던으로 이어지는 영 제국의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데에 핵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말레이 반도 전통의 항구도시인 믈라카 역시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Anglo-Dutch Treaty)에 따라 네덜란드로부터 영국으로 할양된다. 대신 영국은 네덜란드에 수마트라의 한 도시인 벤쿨렌(Bencoolen)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는 1826년 페낭, 싱가포르, 믈라카로 이어지는 말레이반도 서부의 핵심 항구도시들을 묶어 유명한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설립하여 별개의 식민지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해협식민지를 구성하고 있는 세 항구도시의 특징은 무역 중심의 식민지 거대도시라는 점과 인프라 건설을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인들의 이주를 독려하여 대다수의 인구가 중국인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인도로부터 인도인의 이주 역시 영국의 강제, 혹은 독려로 급증하였고, 그 결과 해협식민지는 중국인, 인도인(주로 타밀인), 말레이인, 영국을 비롯한 서양인, 유라시아인 등이 공존하는 19세기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코스모폴리탄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해협식민지에는 영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각종 최첨단의 근대적 도시 인프라들이 건설되는데, 그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해협식민지는 연일 다양한 문화적/기술적 몰이해와 오해, 갈등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면서 식민지 무역 및 금융도시였던 해협식민지는 당시 서구 근대문물의 이식이라는 측면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있는 지역이기도 했기에 온갖 다양한 문화충돌 현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가령 아래와 같은 법령이 그 예이다.

 

폭죽은 보통 공공도로 인근에서 터뜨려진다고 한다. (‘공공도로 인근이란) 공공도로 옆의 베란다에서 터뜨리는 경우, 공공도로를 마주 보고 있는 문 혹은 창문을 통해 터뜨리는 경우, 공공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장소에서 터뜨리는 경우, 공공도로에 인접한 주택의 마당에서 터뜨리는 경우 등이다.”(The Laws of the Straits Settlements Vol.2(1901-1907), 1920, p.246)

 

폭죽은 해협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이 명절이나 주요 행사마다 축하를 위해 터뜨리는 대표적인 놀이이다. 그러나 도시 행정관리의 측면에서 공공도로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폭죽이 매우 위험하고 시끄러우며 환경에도 좋지 않은 놀이임에는 분명하다. 해당 법령에서 핵심은 베란다(verandah)라고 불리는 공간의 성격이다. 다른 공간의 경우 명백히 사유공간이지만, 베란다의 경우 공공도로에 인접한 주택의 개방된 베란다는 보행자를 위한 공공도로이면서, 주택을 소유한 이의 재산권의 대상이기도 하다라고 애매하게 정의되어 있어 19세기 내내 논란이 되었고, 급기야 그 성격을 두고 19세기 말에는 중국인들의 폭동으로까지 이어지는 흥미로운 이슈였다. 분명한 것은 그 정의에서도 보이듯이 해협식민지 법령에서 말하는 베란다는 현재 우리가 흔히 아파트에서 보는 베란다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동남아시아 식민지 도시에 형성되어 있던 베란다란 무엇인가.


베란다 공간의 출현은 19세기에서 20세기 동남아시아 주요 도시와 중국 동남부(광동, 복건) 지역 주요 도시에 형성되어 있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국적으로 퍼져있는 양상만큼이나 이러한 건축양식을 가리키는 용어 역시 매우 다양하다. 숍하우스(shophouse), 파이브 풋웨이(five foot way), 카키 리마(kaki lima), 치로우(騎樓), 우쟈오치(五腳基), 베란다 하우스(verandah house) 등등이다. 그에 따라 건축양식의 기원에 관해 일치된 의견 역시 없다. 크게 몇 가지로 나뉘는데, 우선 중국대륙의 건축문화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 연구들이 있다. 소위 상하점주형식(上下店住形式)’으로써 점옥(店屋)’이라고 불리는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이미 중국 동남부 연해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주로 선착장에 접하여 창고, 작업장, 상점 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일층은 상점 혹은 작업장, 이층은 주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북방 사합원(四合院)’형식의 건축양식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한족의 남하와 강남 개발과 함께 복건, 광동지역의 기후적 특색에 맞게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복건, 광동 연해지역은 송()대부터 동남아시아와 활발히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명() ()대까지 중국인 상인들 및 노동자들이 동남아시아 주요항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 동남연해에 형성된 점옥건축양식이 동남아시아로 이식되었고,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 건축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금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그 기원을 남아시아의 벵갈(Bengal)지역에서 찾는 연구도 있다. 영국이 17세기 동인도회사를 필두로 남아시아에 처음으로 진출한 지역은 벵갈지역이었다. 이후 1718세기에 걸쳐 벵갈지역에 거주하게 된 영국인들은 벵갈인들 특유의 주거형태인 방글라(Bangla 혹은 Bengali)에 유럽식 건축요소들을 가미하여 독특한 건축형식을 탄생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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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벵갈지역 영국의 식민지 관청. 1883. 방글라는 벵갈지역을 비롯한 남아시아 특유의 고온다습한 기후에 적응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토착 건축문화인데, 그 특징은 비와 태양빛을 피하면서 통풍을 원활하게 해주는 외부 공간, 소위 베란다(Veranda)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지붕을 넓혀 현관 전면의 일정 공간까지 커버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고, 앞으로 튀어나온 지붕 양옆으로 기둥을 세움으로써 완전히 개방된 형태의 공간을 가진 건축양식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식 복도(외랑外廊)과 그 복도를 커버하는 넓은 지붕, 동시에 복도를 개방함으로써 발생하는 통풍 등등을 특징으로 하는 벵갈지역 특유의 주거형식인 방글라는 이후 이 지역에 진출한 영국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림-1]과 같이 19 20세기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변형이 이루어지며 벙갈로우(Bungalow)라고 불리게 된다.

 

상술한 것처럼 19세기 초 영국은 싱가포르, 말라카, 페낭 등을 식민화하였고 1842년 남경조약 이후 홍콩을 할양받음과 동시에 주요항구의 개항을 통해 조계지를 확보함으로써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아울러 영국이 인도에서 탄생시킨 특유의 벙갈로우 역시 영국 제국의 확대와 함께 비슷한 기후적 특성을 지닌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19세기 초중반 싱가포르의 도시개발에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미 동남아 현지에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존재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세기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숍하우스 건축양식이 계획적으로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에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말레이시아 반도 및 자바섬에 비슷한 형태의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해당 건축양식이 주로 중국인 이주자들이 거주하는 주거지역 및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중국대륙기원설과 연계하여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해 건너온 점옥건축양식이 열대지방 특유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여 변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처럼 숍하우스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뚜렷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근거가 확실한 부분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해볼 수는 있다. 송대 이후 명·청시기까지 중국 동남연해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에는 점옥형태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건축양식은 복건성과 광동성 출신 중국 상인들 및 노동자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외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자바섬의 주요 항구도시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영국 식민제국이 말레이 반도에 진출하면서 19세기 초기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도시개발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벵갈지방에서 가져온 외랑식 벙갈로우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중국의 주상복합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동남아시아 특유의 식민지 도시건축문화, 즉 숍하우스(shophouse) 건축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상술한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관련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숍하우스 형태의 건축이 행정시스템의 필요에 의해 도시구획 혹은 도시개발의 한 축으로써 계획적으로 건설된 경우는 19세기 초중반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해협식민지가 최초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개의 숍하우스를 연속적으로 규칙성 있게 붙여놓음으로써 이전의 숍하우스 건축양식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외랑(外廊, arcade)식 공간, 즉 베란다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 베란다 공간의 성격을 둘러싸고 중국인 공동체와 영국 식민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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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싱가포르 차이나 타운의 숍하우스 건축과 베란다 공간. 각 건물 일층 점포 앞에 형성된 외부 복도, 즉 베란다 공간은 공공도로인가, 사유재산인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화교화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했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8】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벵갈지역 영국의 식민지 관청

Anthony King, "The Bungalow: an Indian Contribution to the West", History Today Vol. 32, 1982, p.41

그림 2. 싱가포르 차이나 타운의 숍하우스 건축과 베란다 공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raditional_shophouses_in_Upper_Cross_Street,_Chinatown,_Singapore_(17161367876).jpg#/media/File:Traditional_shophouses_in_Upper_Cross_Street,_Chinatown,_Singapore_(1716136787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