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범죄인 인도법안’에 반대하며 인권과 민주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홍콩인들이다. 그러나 이와 다른 면에서도 홍콩과 홍콩인들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홍콩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도심 곳곳에 높이 솟아있는 현대식 빌딩들은 홍콩이 국제 금융과 물류의 허브로서 최첨단의 국제도시임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좁은 골목길과 가파른 계단,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들, 저항의 상징처럼 보이는 벽면의 그라피티는 화려함 이면의 또 다른 홍콩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욱이 외곽의 아파트 단지 밑 구릉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묘지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멀리서 보면 아파트와 묘지가 한 컷에 들어온다. 홍콩인들은 살아서도 비좁은 땅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빈틈없는 공간에서 비좁게 묻히나보다. 그나마 그런 곳에 묻힌 사람들은 명당자리를 차지한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홍콩의 한 아파트 단지
물론 홍콩도 지금은 90% 이상이 화장을 한다. 매장지는 고사하고 화장한 분골을 안치할 납골당도 자리가 없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 때문에 납골당에 안치되기까지 임시로 분골을 보관하는 ‘유골호텔’이 있을 정도이다. 하기야 산 자가 살 땅도 없는데 죽은 자를 위해 땅을 남겨둘 수 있겠는가. 묘지 문제는 비단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다. 홍콩처럼 극명하지는 않더라도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도 그렇고, 땅이 작은 한국에서도 논란거리이다.
전통시기 중국인에게 “죽어서 묻힐 곳이 없다”는 것만큼 저주스럽고 비참한 말년을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중국인, 특히 한족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토장(土葬)이 일반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입토위안(入土爲安), 즉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평안함을 얻는다”는 것은 전통적인 한족의 오래된 내세관이다. 그러한 인식은 지금도 남아 있어 오랜 시간 타국을 떠돌다가도 나이가 들면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시신이라도 고국에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다.
태고시대에는 죽은 자를 안장하는 특별한 방식이 없었기 때문에 시신을 그냥 황야에 방치해두면 새나 동물들이 와서 처리했다. 일종의 조장(鳥葬)인데, 지금도 티베트의 민간에 남아 있는 천장(天葬)의 방식은 그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새가 시신을 깨끗이 먹어 치워야 죽은 자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이후 수장(水葬), 토장(土葬), 화장(火葬), 풍장(風葬), 수장(樹葬) 등 여러 방식이 등장했다. 특히 상‧장례 방식은 중국의 각 소수민족의 역사, 지리, 사회경제, 종교 신앙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토가족(土家族)의 암관장(岩棺葬), 티베트족의 탑장(塔葬), 묘족(苗族)의 현관장(懸棺葬) 등이 그런 예이다. 그중 한족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실행되었던 것은 토장과 화장이었다. 둘 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토장의 흔적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산정동인(山頂洞人)들이다.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것도 최소 4,000년 전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장의 경우는 전국시대 이전에 이미 나타났으며 당송시기를 시작으로 북송시기에 매우 유행했다. 화장의 방법은 위생적일 뿐 아니라 비용이 절감되고 편리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불교의 발달과 함께 유행하게 되었던 화장은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 윤회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송대에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화장의 방식이 유가 윤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유가의 논리에는 토장의 방식이 부합했다. 유가에 의하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새나 동물에게 시신을 맡겨 먹게 하는 방식은 인간으로서 ‘차마 지켜볼 수 없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불효라고 여겼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것은 매장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송대 이후 화장은 금지되었다. 심지어 명청시기에는 법률 조항에 화장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화장의 방식은 땅이 없고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적합한 방식이었고 부득이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명청시기 정부에서 화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해도, 인구가 많고 토지가 적은 강남지역에서는 화장이 여전히 존재했다. 따라서 토장과 화장은 오랜 시간을 공존했다. 다만 주류는 토장이었다.
토장으로 시신을 안장하는 것은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마지막 호의였다. 죽은 자가 흙으로 돌아가 편안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인도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장을 잘 하면 그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유방식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청대에는 죽은 자의 집안에 매장할 토지가 없고 토지를 구매할만한 능력도 없을 때는 토지가 있는 자에게 묘지를 구걸하거나 빌리는 관습이 있었다. 민국시기에 작성된 『민사습관조사보고록』에 의하면, 섬서성 진파현(鎭巴縣), 상남현(商南縣) 등지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장지를 구매할 능력이 없으면 남는 땅을 가진 사람에게 매장할 땅을 구걸하는 습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빈곤으로 인해 가족을 매장할 땅이 없는 상황은 민간에서 무척 많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로 인해 매장지를 차용 혹은 구걸하는 관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땅을 구걸하거나 빌리는 입장에서는 묻힐 땅이 없다는 사실은 얼마간의 땅을 얻을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빌려주는 입장에서도 이를 듣고도 빌려주지 않으면 천하에 나쁜 사람으로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친척이나 친우가 묻힐 땅이 없는 것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다만 이럴 경우에도 반드시 매장지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송대 이후 경제가 발달하고 외지로 나가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각지에는 동향인들로 구성된 회관(會館)이나 공소(公所)가 설립되었다. 회관과 공소의 기능과 역할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지만 타향에서 죽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이것은 타향에서 연고자 없이 죽은 동료에 대한 동정의 표시이자 인간애의 표현이었다. 중국인들은 순조롭게 안장되고 죽어서도 자손으로부터 제사를 받아야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방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토장은 일정한 토지를 점용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토지는 농업생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산이기 때문에, 토지를 잠식하는 토장이 ‘죽은 자와 산자의 토지 쟁탈’이라 불렸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토장의 본의는 자손과 후대가 복을 받는 것이지만 실제로 토장으로 인해 자손의 토지는 잠식되었고, 이는 곧 자손의 생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토장과 화장의 논쟁은 현재적 문제만이 아니다. 전통시기에도 ‘죽은 자와 산 자의 토지 쟁탈’ 문제가 심각했고 이에 대한 찬반논란도 치열했다. 더욱이 토장이 부모에 효도하고 후손들에게 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때문에 후한 장례(厚葬)를 하게 되면서, 더 많은 토지와 관을 짤 수목이 필요했고, 이로 인한 과다 지출과 노동력의 동반은 결과적으로 후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장례문화는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토장으로 인한 국토의 잠식과 과다 지출 현상을 막고자 중국 정부는 화장의 방식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1956년 4월 모택동을 비롯한 136명의 공산당 영도자들은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이 죽으면 화장할 것에 서명하고 화장시설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90년대 초 도시의 90% 이상, 농촌의 50% 정도가 화장 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현재는 보편적으로 화장이 행해지고 있다.
이렇듯 중화인민공화국에 와서 정부의 강력한 조치로 인해 도시에서는 물론이고 농촌에서도 화장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농촌에서 새로운 안장 방식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즉 화장을 한 후에 입관하고 다시 토장을 하여 봉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와 산 자의 토지쟁탈’을 막는다는 화장의 본래의 취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서 이러한 토장의 방식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유방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4억 인구의 중국에서는 이미 화장이 더 이상 선택을 요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문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상‧장례문화는 상당한 보수성을 띠고 있어 이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현재 토장이 부활하고 있는 많은 경우가 지역에 화장시설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화장비용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라고 한다. “돈이 없어 죽지도 못한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이다. 또 토장을 한다 해도 약간의 벌금만 지불하면 용인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일인데 그나마 장점도 없다면 누가 따르겠는가. 무엇보다 상‧장례문화의 개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고 좋은 관습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오랜 시기 논쟁을 거듭해왔던 토장과 화장, 그 어느 것이든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잠시 왔다간 한 인간의 삶을 존중하고 그 수고로움에 경의를 표하는 일일 터이다.
【관습과 중국문화 20】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임.
* 이 글은 2019년 7월 9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칼럼 [차이나 로그인]에 게재된 것임.
참고문헌
前南京國民政府司法行政部編, 『民事習慣調査報告錄』, 中國政法大學出版社, 2005.
曾雄生, 「土葬習俗的農業歷史觀」, 『江西師範大學學報』, 2010-5.
陳孝龍, 「加强和改進農村殯葬改革工作的思考」, 『財會學習』, 20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