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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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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양제’ 정책과 홍콩문제 _ 김태승

199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도시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조계에 대한 재평가였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조계는 제국주의 침략의 기지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왔으나, 개혁개방의 풍조 속에서 그러한 일면적 평가는 약화되고, 조계가 수행했던 긍정적 역할이 논의의 중심에 떠오르게 되었다. 양무운동에 대한 재평가와 결부된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상해의 역사적 경험도 과거와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게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중국 성립 이전 상해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실제로는 아편전쟁 이래 3개의 주권지역으로 분리되어있었다. 영미가 중심이 된 공공조계, 프랑스 조계, 중국주권지역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분단에도 불구하고 상해를 하나의 이름으로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이라는 측면에서 상해가 하나로 통합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주하는 주민들도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상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계는 중국인들에게 경제적 측면에서는 미성숙한 중국의 시장경제체제를 견인하는 선구자이며,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험의 모델로 여겨졌다. 군벌지배체제 하에서 억압되었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이 상해에서 왕성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조계라는 특수지역의 역할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해경험은 관찰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상해에 주목한 사람들은 이미 1920/30년대에 상해가 세계 최고수준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점을 중시할 것이며, 정치적 측면에서 상해사회를 관찰한 사람들은 국가의 역할과 기능의 상대성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어쨌든 민국시대 상해의 번영과 그 선진성은 1980/90년대 개혁개방을 시도하고 있던 중국에서는, 경제특구의 건설문제 등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경험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체제의 다양성은 상해경험에 근거해 볼 때, 그것이 가진 역동성을 적절하게 국가가 통제할 수만 있다면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경제발전에 매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1978년 대만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공산당 113중전회에서 제기되고 1982일개국가 양종제도로 확립된 일국양제의 정책적 의도는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의 경제, 사회규모가 중국에 비해 작기 때문에 한 우산 안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하나의 중국으로 동화시켜 나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신감이 1982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31조에 규정된 특별행정구의 설치로 나타났다.

 

1984년 영국과 중국이 홍콩반환에 합의하고, 마침내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었을 때, 홍콩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많은 홍콩인들이 다른 나라로의 이주를 계획하는 등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홍콩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대 홍콩정책이 북경정부가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와 같이 앞으로 50년간 홍콩의 체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살아나면서 안정되기 시작했고 홍콩의 번영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선 港人治港(홍콩인에 의한 홍콩지배)”의 원칙은 행정장관의 선출 등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선제인 행정장관의 선출과정에서 중국정부의 개입과 간섭이 홍콩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게 만들었다. 2014년의 우산혁명은 그 시작이었다. 공산당이 사실상 행정장관의 선출에 개입하고, 후보자격을 심사하는 등의 일련의 조치는 원래 문서로 약속했던 홍콩 관습체제의 50년 유지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이미 2012년 애국주의 교육의 강제를 통한 홍콩의 중국화 시도를 저지했던 홍콩인들은 행정장관의 직선제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홍콩인들의 결정이 홍콩의 미래와 관련하여 현실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홍콩의 미래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은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 홍콩에서는 직선제 추진에 합의하더라도 중국이 거부하면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에 실망한 홍콩인들에게 2017년 친중파 행정장관의 선출과정은 홍콩시민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키게 만들었다.

 

이미 2015년 말, 홍콩의 한 출판업자가 사라지는 사건으로 점증되기 시작한 홍콩 시민사회의 분노는 관련법개정에서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별도의 사법체계에 속해있는 홍콩의 시민이 중국으로 강제 연행된 탈법적사건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던 홍콩의 중국화와는 달리 사실상 중국사법체계에의 홍콩 통합이라는 매우 직접적인 문제를 홍콩 시민사회에 던졌던 것이다. 거기에 위에서 언급한 친중국 성향의 영혼 없는행정장관의 선출과 <범죄인 인도에 관한 법률개정안>의 제기는 홍콩시민사회를 격동으로 몰아넣게 만들었다.

 

그런데 홍콩에서의 이러한 상황의 진전은 홍콩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시진핑 정권의 통일정책의 기조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마도 우선은 타이완의 정치지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일부 여론 조사에서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영토회복 후 불과 20여년이 지난 이 상황에서 홍콩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타이완 안에서의 친중국 정치세력의 입지를 현저히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소위 법치를 강조하는 중국 당국이 문서화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다른 어떤 화려한 수사학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고, 지금 중국 공산당이 홍콩에 대해서 하는 행동은 오직 힘의 논리에 근거한 것으로, 타이완에 대한 어떤 약속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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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2019년 6월 홍콩시위대의 모습

 

등소평과 그 시대의 지도부가 홍콩에 대해서 취했던 일련의 정책적 선택은 상당히 지혜로운 부분이 있었다.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그것의 법제화로서의 특별행정구제도는 홍콩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홍콩의 가치를 여러 방면에서 인식했다면, 인내심 있게 때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더구나 여행과 통신을 통해 사람들이 연결되는 요즘 현실에서 홍콩에서 보이는 중국의 행태는 결코 감추어질 수 없으며, 그 장래와 국제정치적 행동은, 주변국들의 심각한 우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선택은 트럼프, 아베 등 주변의 전투적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 기반을 오히려 강화시켜 나가게 될 것이며, 타이완의 탈중국화를 가속화시켜 나가게 될 것이다.

 

일국양제 구상이 상해경험과 연관된 것이라면, 상해 사회의 다양성이 중국의 현대를 만드는 중요한 자원이었음도 기억해야할 것이다. 대량의 중국인 이주가 민국시대의 상해 조계를 중국화 시켰듯이, 대량의 인적교류는 홍콩의 정체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홍콩시민사회에 제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중국정부는 중국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민국시대의 상해가 그랬듯이, 홍콩의 경험에서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법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홍콩은 중국의 일부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중국은 공산당 지배의 단일사회에서 얻을 수 없는 활력을 홍콩에서 찾아낼 수 있도록 홍콩의 건강성을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노력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홍콩을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유지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지금 중국의 홍콩 정책은 타이완의 미래를 친미로 몰아가고, 과거의 친중 세력이 특별행정구에서 외연을 확장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트럼프에게는 아주 즐거운기회가 아닐까?


김태승의 六十五非 13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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