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칼럼에서 우리는 대항폭력 노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반폭력의 정치 모델, 곧 폭력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정치로서의 반폭력의 정치 모델에 대해 논하면서,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몇 탁월한 사례들을 검토했다. 특히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극단적 폭력을 멈출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실로 유일한 정치가이자 이론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폭력을 단순하게 거부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노선은 (오늘날 유행하는 이러저러한 비폭력론이 취하는 형태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극단적 폭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간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성취된 이후 인도 내의 종교적 갈등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오자, 갈등을 단지 일시적으로 유예시킬 수나 있었던 단식(간디 자신의 목숨을 건 단식) 외에 그 어떤 유효한 개입의 수단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폭력 노선은 간디 사후 인도 내 종교 분파 간 대학살의 참극이 일어나는 일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맑스주의의 이런 반폭력의 정치는 혁명 이후 폭력 독점의 홉스적 모델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는가? 이 문제는 사실상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경험했던 문제로, 단순히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몇몇 지도자들의 개인적 오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봐야 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단번에 가공된 것이 아니다. 그 용어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1848년 혁명에 대한 분석(<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였는데, 맑스는 그것을 공산주의자들이 채택할 수 있는 여러 전술들 가운데 하나의 전술로 제안했으며, 그 내용을 이루었던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임을 보여줌으로써 중간계급으로서의 농민들을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분리하여 자신들의 동맹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1848년 혁명은 실패했으며, 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의 착수와 더불어) 맑스의 텍스트에서 완전히 실종되었다가 20여년이 흐른 뒤 1871년의 파리코뮌에 대한 분석(<프랑스 내전>)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때 그 관념은 단순히 적절한 정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전술이 아니라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취해야할 이행의 보편적 형태라는 성격을 부여받았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가공할 모순이 이미 이런 프롤레타리아 독재 관념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모순으로 인해 맑스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논하는 바로 그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그 텍스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안에서의 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어떤 논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통치’와 공산당의 ‘지도’라는 관념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양한 이질적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대중을 통일시켜 하나의 단일한 통치 계급으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의 중심으로서의 공산당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맑스에게 수십만 대중들의 희생으로 끝난 파리 코뮌의 처참한 실패는 바로 이 점을 보여주는 듯이 여겨졌을 것이다. 지배 계급의 압도적인 폭력과 대결함에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는 무장해제까지는 아닐지라도 매우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의 일주일”이라고 불리는 파리 코뮌 진압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곧바로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 것은 이 때문이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으로 귀결된 바 있다.
하지만 맑스 자신을 포함하여, 맑스주의는 이 이론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 커녕, 파리 코뮌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 모든 사회주의 혁명을 결정적으로 홉스적 폭력 독점 모델로 변질시킨 것이 바로 이 모순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 모순은 정확히 혁명의 방어를 둘러싼 딜레마로 정식화될 수 있다. 혁명은 노동대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자기 통치의 역량을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혁명을 부르주아지나 또 다른 반혁명세력들(외국의 군대를 포함하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노동대중을 군대로 조직해야만 하며, 따라서 그들을 규율화해야만 한다. 문으로 내보낸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규율권력(미셸 푸코)이 다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항혁명을 불러오지 않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늘 자신을 더 극단적인 혁명 또는 “초-혁명”(Ultra-Revolution)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혁명의 도착(perversion)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전시 공산주의 시기 레닌은 클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당 내외부에서 터져 나온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공산당 내에서의 ‘분파형성권’(right to tendency)을 금지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국 스탈린에 이르게 되면 당의 일괴암적 통일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숙청의 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우리는 또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유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오는 중국 공산당의 기술관료주의화를 비판하기 위해 ‘요새를 포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들을 동원하여 반역을 조직했지만, 점점 상황이 통제 불가능하게 되자,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계급투쟁의 최종적인 해결장소는 여전히 당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혁명을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당이 진리의 장소로 나타나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뿌리 깊은 사고를 마오 또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76년에 있었던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 대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 문제를 둘러싼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폐기하려는 당의 주류적 입장에 맞서 투쟁했으며, 그의 제자인 발리바르도 알튀세르와 대동소이한 입장을 택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1977년 11월에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 <선언>(Il manifesto)이 주최한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콜로키움 이후 사정은 크게 변했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종전 입장을 되풀이하는 글을 그 콜로키움에서 발표하고 몇몇 인터뷰를 행한 반면, 발리바르는 1978년 초에 작성한 글(<국가, 당, 이행>)에서 자신의 스승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사실상 1976년 논쟁 당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에 찬성했던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와 수렴하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물론 풀란차스의 입장이 당의 주류적 입장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축들 가운데 하나는 마오의 “조반유리”를 스피노자의 “오히려 인식하라”라는 슬로건과 결합함으로써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사유하는 작업이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작업에 있어서 그는 혁명의 지배적인 상 자체를 전환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혁명의 상은 사실상 프랑스 대혁명의 모델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반드시 이런 권력장악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통일된 계급의 독재로서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혁명 방어의 딜레마를 좀처럼 극복할 수 없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론(mixed regime)을 급진화하면서 마키아벨리(Nicollo Machiavelli)는 고대 로마 공화국의 사례에 준거하여, 혁명은 한 계급의 독재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삼 계급(군주, 귀족, 인민)이 서로를 견제하고 갈등하면서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장구한 과정의 조직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갈등적 민주주의’(conflictual democracy)의 모델을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모델을 어떻게 현재화할 것인가? 우리가 혁명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혁명이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세력관계 그 자체의 제거로서의 권력 장악이 아니라, 세력관계의 상이한 조직화다. 지배자들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대항폭력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상호 도착을 제어하는 혁명 문명화의 길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좌파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마오 6】
최원 _ 단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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