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산파개혁에 대한 연재에서는 중국정부가 어떻게 남녀평등과 의료현대화라는 혁명과 근대화의 대의를 통해 젊은 며느리/산모에 대한 기존의 시어머니와 산파의 통제를 약화시켜나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그 동안 중국의 여성해방 담론에서도 비교적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던, 딸로서의 여성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역사 속의 여성, 특히 딸의 지위를 한두 마디 말로 규정짓는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18-19세기 중국 농촌에서 딸은 현금화가 가능한 재산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던 듯하다. 필자가 석사논문을 준비하며 살펴보았던 사천성 파현지방의 재판 기록들이나 심지어는 20세기 초반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민국시대 사법 당안에서도 딸들은 종종 춘궁기 때 팔 수 있는 마지막 재산으로 등장하였다. 또 딸을 둘러싼 분쟁은 굳이 춘궁기가 아니더라도 결혼 시 그 딸의 가격을 놓고, 또는 그 대금을 누가 받느냐에 대한 문제가 종종 생겨나곤 했다. 인구증가와 정치적 혼란으로 생존의 기로에 섰던 중국의 많은 농촌 가정들에게, 부족한 식량을 먹여가며 키워도 결국 남의 집으로 시집보내는 딸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식이면서도 동시에 시집보낼 때 한꺼번에 그 대가를 지불받을 수 있는 적금통장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전에 필자가 언급한대로 19세기말 약 20%의 여아가 출생과 동시에 버려지고 살해당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렇게나마 살아남은 딸들은 운이 좋은 축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마저도 그들이 ‘남녀평등’이라는 혁명의 대의를 내세울 때, 그 ‘해방’의 대상으로 삼은 건 주로 봉건적 가부장제하에 억압받는 며느리와 아내였을 뿐, 딸은 여성의 삶에서 시집가기 전에 거치는 일시적인 단계로 치부하며 거의 무시했던 듯하다. 심지어 필자가 확인한 문서 중에는 1950년 초반 딸들이 토지혁명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토지를 자신들의 소유로 등록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당 지도부가 이러한 요구를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소이기주의로 매도한 경우도 있었다. 당이 보기에는 토지개혁으로 농촌 가정의 생활이 향상되면 자신들도 아내와 며느리로서 모든 이익을 누릴 터인데, 공연히 형제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켜 남성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거부감만 갖게 한다는 것이었다.
허나, 비록 중국혁명기의 여성해방 담론이 딸들에게 관심이 적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이 중국 혁명과 정부의 자장 밖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그들의 딸로서의 이익과 존재도 이 혁명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영향 받고 규정 당했다. 가장 작은, 그래서 놓치기 쉬운, 그러나 의미 있는 예로 딸의 상속권을 들 수 있다. 필자의 지도교수 중 한 분이었던 Kathryn Bernhardt의 민국시대 여성의 상속권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중국 국민당 정부가 민법의 상속에 있어서 남녀평등을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이러한 법령은 거의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실제 중국 공산당이 제정한 혼인법에서 남녀 동등상속을 규정했음에도 거의 변하지 않은 듯했다. 다만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딸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보는 시각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토지개혁 당시 각 가정이 받게 된 토지와 가옥의 넓이는 각 가정의 인구와 노동력에 따라 비례했고 당연히 딸들도 그 계산에 포함되었다. 즉 딸들이 그들의 ‘몫’을 주장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실제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만약 딸들이 그들 몫의 상속분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을 때 중국 법원들은 대부분 이를 인정하였다. 즉, 혁명의 과실을 정부 스스로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토지가 집산화 된 이후에는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몇몇 딸들은 집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이나 서까래, 심지어는 과일나무의 소유권과 상속권을 놓고 그 형제들과 법정에서 다투었다. 실제 1956년 중국 정부가 분석한 135건의 상속분쟁에 등장하는 108명의 자녀들 가운데 딸들이 70명(65%)을 차지했던 것을 보아도 딸들의 부모 재산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필자가 산서/하북지역에서 인터뷰할 때,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이기적인’ 딸들의 존재를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모두들 부모의 재산은 아들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고들 진술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몇몇은 형제들이 시집간 누이들에게 자발적으로 약간의 현금을 주어 그러한 요구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말해주었다. 비록 혁명의 세례를 받은 딸들의 도전이 형제 상속의 굳건한 관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관행에 미세한 금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다 광범위한 변화는 중국 공산당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데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여성노동 동원과 집단농장화였다. 이 두 정책은 농업생산 증가와 사회주의사회 건설에 방점을 두고 실시된 정책이었지만 딸들의 가족 내에서의 지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즉 앞서 데릴사위부분에서 살펴본 대로 딸들이 집단농장에 나가 농업점수를 받아오고 그 노동점수가 바로 각 가정이 추수 후 받는 식량으로 변환되면서 딸들과 그들의 부모는 얼마나 그들이 집안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집단농장은 집안에 갇혀 있던 딸들에게 또래 여성이나 남성들을 만날 기회를 제공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상대자를 부모님의 의사에 반해 스스로 정하게도 해주었다. 만주지역에서 현장조사를 했던 Yan Yunxiang의 보고에는 심지어 부모가 정해준 남편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위를 들고 잠자리에 드는 딸의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외부인이자 외국인인 필자에게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를 말해주는 촌민들은 없었지만, 그들도 종종 딸들이 원해서 혹은 바지런한 딸을 주변에 두고 싶어서 같은 마을에 시집보낸 사례는 적지 않았다. 필자가 이를 수치화/통계화 한 적은 없지만, 산서의 C촌에서는 인터뷰한 가족들 중 최소 셋은 그렇게 부락내로 딸들을 시집보냈다. 그 중 둘은 장녀였다. 그리고 그 둘 중에 하나가 바로 C촌의 부녀회장을 맡았었고, 다른 하나의 남편이 촌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필자가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친정부모의 지지도 그들의 ‘성공’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코 일반화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혁명은 생존의 맥락에 갇혀있던 대다수 농민의 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었던 것 같다. 물론 대부분의 딸들은 여전히 형제들만이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또 많은 딸들이 부모님이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용기 있고 강단 있던 또 다른 다수에게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華北 농촌 관행 조사 7】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difang.kaiwind.com/chengdu/dfmssy/201507/17/t20150717_2636966.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