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에는 현재의 민사분쟁과 유사한 성격의 사회적 분쟁을 이른바 민간세고(民間細故), 즉 민간의 사소한 일이라고 통칭했다. 여기에는 토지, 채무, 혼인, 상속 등의 분쟁이 포함되었다. 이중 토지관련 분쟁은 주로 농지와 택지, 가옥의 매매와 소작, 관개수리, 묘지 등과 관련된 분쟁을 포함하였다.
청대의 사법과 관련된 공문서와 민간의 계약문서 등을 살펴보면, 민사분쟁이 매우 보편화되어 민사분쟁이 야기한 소송안건이 지방관청 소송안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光緒四年(1878)七月十三日 彭正漢呈爲强戽水塘迫求示諭事
위 사진은 『황암소송당안과 조사보고(黃岩訴訟檔案及調査報告)』에 수록된 제13호 안건의 고소장으로, 청 광서4년 (1878년) 절강성 황암현 포구촌의 팽정한(彭正漢)과 관련된 안건이다.
당시 마을에 마실 물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 연못의 물을 마셨다. 그런데 팽리부(彭利富)가 팽정한에게 돈을 빌리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밭에 물을 댄다는 핑계로 연못의 물을 빼내려 하였다. 이에 팽정한은 연못의 물을 절반은 뽑고 나머지 절반을 식수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팽리부가 응하지 않자 팽정한은 현청에 소송을 제기하여 현관이 공정하게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현관은 최종적으로 지시를 내려 마을로 돌아가 친족끼리 협의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농업용수, 식수와 관련된 분쟁으로 팽정한은 당시의 소송관련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은 고소장을 작성하여 현청에 고소를 하였지만 현관은 친족간에 협의하라는 결정을 내리고 정식의 재판은 진행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상황이 소송이라는 사법절차와는 다른 방식의 민간조정 관행이었다. 위의 안건은 친족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현관은 조정의 주체를 친족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친족 이외에도 당시의 향촌조직과 관련한 인물들, 즉 보정(保正), 갑장(甲長), 패두(牌頭), 단수(團首), 객총(客總) 등 다양한 직책의 인물들이 민간조정에 참여하였다. 또한 향신(鄕紳)이나 전문적인 중개인(中人)등도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의 고소장에서는 현관의 지시만 있을 뿐 이후의 상황전개는 알 수 없지만 향촌사회 내의 민간조정의 결과는 다양한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친족이나 마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의미로 벌금을 내거나 음식 등을 대접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일종의 계약문서를 작성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는 분쟁의 자초지종을 기록하고 당사자들이 이후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계자들과 증인들이 서명하여 약속이행을 보증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와 같은 민간조정은 청대 법률에 규정된 소송이라는 절차와는 다른 민간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송의 남발을 방지하고 민사소송의 적체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관청에서도 소송보다는 민간조정을 권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관습과 중국문화 18】
허혜윤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참고도서
田燾 許傳璽 王宏治 主編, 『黃岩訴訟檔案及調査報告 傳統與現實之間―尋法下鄕』, 法律出版社, 2004.
田燾 著 김지환 등 역, 『외면당한 진실-중국 향촌사회의 제도와 관행』, 學古房,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