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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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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두 얼굴 – 호문호와 임문경의 친일과 그 후 (下) _ 김종호

관행중국 20186월호에 이미 서술한 것처럼 19422월 싱가포르는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 명칭 역시 쇼난토(昭南島 Syonan-to)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싱가포르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지역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게 된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 바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풍부한 경제적 역량을 가지고 있던 화교화인 그룹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그 기선제압의 일환으로 이미 항일화교명부(抗日華僑名簿)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100여 명이 넘는 항일단체 지도자와 임원 그리고 주요 회원들의 주소를 미리 파악해 놓고 점령 이후에 모두 교외로 끌고 나가 기관총과 총검으로 학살하였다. 이를 소위 숙칭(Sook Ching 肅淸)’사건이라 부른다. 이러한 학살은 화교화인 유력인사에 그치지 않고 싱가포르 거주 일반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그 피해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사실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을 전후하여 많은 화교화인 엘리트들이 싱가포르를 탈출하려 시도하였다. 저명한 화교사업가인 진가경(Tan Kah Kee 陳嘉庚)이 인도네시아로 탈출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사위이자 화교은행(OCBC)의 행장인 이광전(Lee Kong Chian 李光前)과 부행장 이하 간부들 역시 인도로 탈출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화교화인들이 탈출에 성공하기도,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잡히기도 하였다. 반면 탈출할 방법이나 기회를 갖지 못한 일반 화교화인 주민들의 경우에는 식민지 지배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임문경(Lim Boon Keng 林文慶)은 그대로 싱가포르에 잔류하였고, 일본의 점령과 그 직후 벌어진 잔혹한 학살을 목도하게 된다.

 

당시 일본 군정의 간부이자 숙칭사건으로부터 임문경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을 구한 바 있는 시노자키 마모루(篠崎 護)는 임문경에게 쇼난화교협회(昭南華僑協會)’의 설립을 요구하였는데, 임문경은 그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당시 70)로 한 차례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숙칭사건과 싱가포르 화교화인들의 고난에 충격을 받은 임문경은 결국 시노자키로의 제안을 수락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임문경을 회장으로 하고 21인의 이사회를 둔 일본의 괴뢰조직’, ‘쇼난화교협회가 탄생하였다. 일본군정은 이 단체를 통해 50만엔의 봉헌금(奉獻金)’을 모으도록 했고, 그 처리 역시 쇼난화교협회가 담당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3년 동안 임문경을 회장으로 하는 쇼난화교협회는 거액의 전비와 인력을 일본군정에 제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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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시노자키 마모루. 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그는 전쟁 이전부터 말레이 지방과 싱가포르에 거주했다고 알려져 스파이로 의심을 받은 바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숙칭사건으로부터 수많은 중국인과 현지인들을 구해 일본의 쉰들러라고 불리기도 하며, 전후에는 숙칭사건의 중요한 목격자로서 전범재판에서 협조적으로 증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그 이후에도 별다른 비난 없이 순조로운 인생을 1991년까지 살았다. 그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 인사라는 평가와 영웅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중국대륙 정부와의 관계로 인해 항일인사로 분류되었던 호문호(Aw Boon Haw 胡文虎)의 경우 탈출하는 과정에서 홍콩에서 일본군에게 나포되었고, ‘지나파견군(支那派遣軍)’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살아남게 된다. 당시 그의 친일행각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 보고서에서 그는 일본, 국민당, 공산당 등 모든 정권과 연계를 맺고 있는 기회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호문호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이 난 이후에도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는데, 전후 그의 아들을 일본인 여성과 결혼시킨 것과 일본의 증권회사와 협력하여 금융업에 진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 화교화인 사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전후 화교화인 커뮤니티의 리더를 언급할 때 그의 영향력을 진가경에 비해 현저히 낮추는 계기가 되었다.

 

오문호와 임문경 둘 모두 저명한 화교화인 엘리트로써 일본 점령기간 동안 친일활동을 벌였다. 그것도 단순 선전이나 여론조성과 같은 소극적 협력이 아닌, 전비를 마련하여 그들의 조국인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본에 무기와 보급을 조달하는 적극적 활동이었다. 그러나 전후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상술한 것처럼 호문호의 경우 친일경력이 오점이 되어 1942년 이전 중일전쟁 내내 국민당의 전비를 모금하고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비난에 시달리다 말년에는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웬만큼 이름있는 화교화인들은 다 가지고 있는 싱가포르의 거리 명칭도 호문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반면 임문경은 함께 친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존경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공고해진 측면마저 있다. 현재 싱가포르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지하철역(Boon Keng MRT Station)이 있고, 도로이름 역시 두 개(Boon Keng Road, Upper Boon Keng Road)나 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임문경이 쇼난화교협회를 설립하여 일본의 전비를 지원하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당시 싱가포르를 비롯한 말레이 화교화인들의 정신적 지주 및 원로 역할을 하던 임문경에 대해서는 일본군 역시 이미 파악해 놓고 있었고, 싱가포르를 점령하자마자 그와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아랍 스트리트(Arab Street)에 있던 강제수용소에 감금하였다. 그 상황에서 압박을 가하며 화교협회의 설립을 강요했지만 임문경은 한 차례 거절하였고, 일본군은 그의 부인으로 타겟을 변경하여 뜨거운 햇볕아래 무릎을 꿇리게 하고는 4시간 이상 모욕을 가하며, 임문경을 압박하였다. 그는 이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수락하였고, 그의 집에는 24시간 감시하는 감시자가 따라붙게 된다.

 

당시 일본군 치하의 싱가포르 화교화인들은 매우 엄혹한 환경에 처해있었는데, 이유없이 학살을 당하고, 강제수용소에 잡혀 고문을 당하는 데다 일본군에 의해 외부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전달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들을 이끌어야 할 대부분의 화교화인 지도층들은 모두 탈출하였고, 영국군마저 일본에 패퇴하여 그들을 버린 채 물러난 상황이었다. 싱가포르의 화교화인들을 대변하고 이끌 리더의 부재야말로 일반 화교화인 주민들을 힘들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1945년 이후가 되면, 탈출하였지만 기득권을 가진 구세대 화교와 신세대 화교들 사이에 세대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영국의 재지배에 대한 극렬한 저항감이 화교화인 공동체 사이에 퍼지게 되면서 결국 싱가포르의 자치와 독립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 중국대륙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구세대와 영국과 중국으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공동체와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신세대 사이의 갈등에 불이 붙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문경의 경우 당시 일본점령하 싱가포르 화교화인들의 대변인과 리더를 맡아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고난을 함께 감내하였다고 하는 사실이 그 행위에 대한 정상참작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당시 싱가포르에서 복건계 화교화인들과 일본인 사이의 통역 역할을 했던 한 복건계 친일 대만인의 기록에 따르면 쇼난화교협회의 드러난 목표는 일본의 전비 마련이었지만, 그 감추어진 진정한 목표는 싱가포르 화교화인들의 구조와 보호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50만엔을 요구한 일본군에 대해 겨우’ 28만엔만을 모금하여 주었고, 이에 대한 추가 헌금 모금에 대한 압박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력하게 되었다는 사연이 일반 화교화인들로 하여금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었을 수도 있다. 당시 다양한 계층의 많은 화교화인들이 임문경과 같이 일본의 학살과 압박에 못 이겨 일본에 협력하였는데, 전후 영국이 다시 돌아왔을 때 이들 친일 화교화인들의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간주하여 일괄정리하려고 하였다. 탈출한 이들은 재산상에 아무런 손실이 없고, 남아서 고초만 당한 이들이 친일과 적산으로 분류되는 현실에서 임문경의 존재는 일반 화교화인들에게 변명과 위로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친일, 애국이라는 프레임보다는 누가 우리와 고난을 함께 해주었는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측면에서 탈출하다가 잡힌 데다가 전후에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호문호에 대한 화교화인들의 여론이 좋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애국심의 대상이 명확한 한국을 비롯한 다른 피식민지인들이 가진 경험과 인식과는 확실히 다른 결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이들이 애국의 대상이 모호한 이주민 그룹으로서 그러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의 화교화인들에게 애국심을 가지고 충성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매우 복잡 다양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미 20세기 초중반이 되면 동남아시아의 화교화인 사회와 중국대륙 사이에는 서서히 메울 수 없는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26년 아모이대 총장이었던 임문경과 같은 대학 중문과 교수였던 노신 사이에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고 벌인 설전과 갈등이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주은래(周恩來)가 해외거주 중국인의 이중국적 금지를 선언한 것이 동남아 화교화인들을 중국 본토로부터 급속히 단절시키는 중요한 제도적계기였다고 한다면, 어쩌면 임문경을 비롯한 화교화인들의 일본 식민 경험과 그 이후 애국심을 배제한 독립된 이주민 공동체로서의 자각이야말로 그들을 중국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관념적계기가 아니었을까.

 

저명한 기업인으로서 호문호의 선택과 지식인이자 교육가로서 임문경의 선택은 그들의 진실한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당시 주변인들에게는 단순히 이익과 생존만을 추구하는 장사치의 기회주의적 태도와 화교화인들과 끝까지 고난을 함께한 참된 지도자로 여겨져 그들에 대한 평가를 가른 기준이 되었다. 다만 비난은 받았을지언정 호문호의 친일을 통한 생존모색이 없었다면 그의 대표상품인 호랑이 연고(Tiger Balm)’가 현재까지도 동남아시아와 중국, 대만, 홍콩에서 잘 팔리는 초국적 인기 상품이 되었겠는가. 외부자이자 학자의 시선에서 호문호의 선택을 통해 동남아 화상(華商)들 특유의 묘한 생존력의 일부를 엿본 것 같은 흥미로운 느낌마저 든다. 어쩌면 호문호는 지하에서 이걸로 충분하다고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신념으로 고난을 함께한 친일 지식인은 지명을 남겼고, 이익을 위해 친일을 한 기업가는 상품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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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임문경의 이름을 딴 분컹 지하철역(Boon Keng MRT Station)과 호랑이 연고를 비롯한 다양한 의료제품을 생산하는 싱가포르 호파(Haw Par)그룹의 테크노센터 전경. 창업자의 친일행적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1969년 창업자와 동생의 이름 끝자(虎豹)를 따 설립된 호파그룹은 현재 시가총액 26천억, 2018년 한 해 영업이익 1,600억을 기록한 객가출신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5】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1] 시노자키 마모루

https://en.wikipedia.org/wiki/Mamoru_Shinozaki

[사진2] Lim Boon Keng MRT Station & Haw Par TechnoCenter 전경

https://en.wikipedia.org/wiki/Boon_Keng_MRT_station#/media/File:Boon_Keng_MRT_4.JPG

https://www.hawpar.com/our-businesses/propert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