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차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문화란 특정 집단의 행위양식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형성되는 것이니, 집단이 다르면 행위양식이나 가치관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민족과 역사를 가진 거대한 중국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집단의 다양한 층위까지 고려한다면 중국 내부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다른 민족인 한국이랴. 그러나 한국의 많은 문화가 중국으로부터 수용되었기에, 다르다고 보면 너무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놀라게 되고, 같으려니 생각하면 너무 달라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결혼 관습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얘기하자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결혼 전에 함이 들어오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좀 다른 풍경들이 연출된다. 한국은 결혼 전날 신랑과 함진아비들이 신붓집에 안 들어오려고 버티는 것을 신부측에서 겨우 돈봉투로 입막음하며 들어오게 만든다. 그에 비해 중국은 결혼 당일 아침 함을 진 신랑이 신붓집에 들어오려는 것을 신붓집에서 막는데, 신랑이 신부측에 돈봉투를 쥐어주며 기를 쓰고 들어간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이러한 결혼 관습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물론 현재는 형식적인 것이고 재미가 곁들여진 흥미로운 결혼 풍속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연원과 그로 인해 형성된 제도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은 신랑이 신붓집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랑이 안 들어오려고 버티는 것이고, 중국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가서 시집살이를 시작하는 것이니 신붓집에서 신부를 못 데려가게 막는 것이 아닐까. 필자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데는 이유가 있다.
원래 중국 전통 혼인제도는 친영제(親迎制)이고, 한국은 조선 전기만 해도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 보편적이었다.1) 고려시대에는 딸도 아들과 같이 상속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혼인 방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의 친영제는 남성 집안을 중심으로 한 혼인 양식이었다. 즉 중국의 혼인은 중매인의 주선으로 6례(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에2) 따라 진행되었다. 혼례의 마지막 단계인 친영은 신부를 신랑집으로 맞이하여 혼인식을 올리고 바로 시집살이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혼인 후 신부는 친정과 단절된 채 시댁에 적응해야 했고 남편에 의지하는 종속적인 입장이 되었다. 한편 남귀여가혼은 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루고 이후 오랫동안 처가에서 살며 자식을 낳고 기르다가 비로소 시댁으로 오는 한국의 전통 혼인양식이었다. ‘장가든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신사임당이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살다가 결혼 20년 만에 율곡 이이와 다른 자식들을 데리고 한양의 시댁으로 가서 살았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로, 남귀여가혼의 예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혼인 방식은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전기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양식이었다. 이는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명문화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혼인 후에도 신부가 친정에 오래 머물게 되다보니 혼인 후 가정 내의 여성의 지위가 혼인 전과 큰 차이가 없이 유지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딸이 아들과 함께 균분상속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친영제를 채택했던 중국에서 신부가 친정의 상속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아들들에게만 균분상속이 행해졌던 것과는 구분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중국의 유교에 바탕을 둔 가족제도를 받아들였다. 조선은 정책적으로 남성 집안을 중심으로 한 혼인인 친영제를 시행하였고 이를 사회에서도 장려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유교의 6례에 따른 혼인양식이 도입되었다.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지만, 차츰 명종 때부터 중국의 친영제와 조선의 남귀여가혼을 절충한 방안들이 등장했다. 즉 반친영(半親迎)의 기록이 보인다는 것이다.
반친영은 신붓집에서 혼례를 치루고 신부가 혼인 후 잠시 동안만 친정에서 지낸 후 멀리 신랑의 집으로 가서 시집살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혼인과 함께 바로 시집살이를 시작하는 친영제와 혼인 후 오랫동안 신붓집에서 살던 남귀여가제를 절충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 신부가 남편집에서 혼인생활을 하게 되면서 친정의 가족과는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멀어져 친정에서의 상속에서도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이후 딸은 상속에서 배제되었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아들들만이 상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상속에서 철저한 형제균분이 행해졌지만, 종법제를 수용한 조선에서는 형제균분이기 보다는 장자를 우선시하는 원칙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점차 확고해졌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중국에서는 적장자상속의 종법제가 점차 사라지고 당대(唐代)에 와서는 형제균분의 상속 원칙이 법제화되었다. 다만 종법제의 잔재로 장자(長子)는 여전히 제사의 주재권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간의 재산을 더 얻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 원칙은 형제균분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모든 아들들에서 점차 장자로 한정되었다. 이에 따라 장자에게 돌아오는 봉사조(奉祀條: 제사비용)가 과도하게 지급되면서 장자 우선의 원칙이 뚜렷하게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균분으로 인한 토지 분산을 막아야 한다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튼 조선에서는 적장자 우대상속이 확산되었고 18세기 이후 실제로 형제들 사이의 상속 재산에서도 격차가 커지게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 혼인과 상속은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자녀균분’이었다는 점, 또 하나는 조선이 종법제라는 중국의 법과 철학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중국과 동일한 형태의 ‘형제균분’이 아니라 ‘장자 우대상속’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화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문화는 사람들의 이동과 함께 퍼져나가고 전파된 지역의 각종 요인과 결합하여 변용된다. 특히 관습은 법과는 별개로 어떤 집단이나 민족이 처한 자연환경 혹은 사회, 경제,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따라서 지구상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나타난다는 혼인제도는 민족에 따라 지역의 환경적 요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관습과 중국문화 17】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서 유래했다.
2) 6례는 『의례(儀禮)』에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는데, 납채(納采: 정식 혼인 신청), 문명(問名: 여자의 사주팔자를 물음), 납길(納吉: 약혼), 납징(納徵: 혼인 예물을 보냄), 청기(請期: 혼인날짜 결정), 친영(親迎: 신부를 맞이함, 즉 혼인식)을 말한다.
참고문헌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경인문화사, 2004.
손승희, 『중국의 가정, 민간계약문서로 엿보다: 분가와 상속』, 학고방, 2018.
문형진, 「한국 혼인풍속에 미친 중국 법문화 영향」, 『중국연구』 48(2010).
이전, 「혼인‧가족제도에 관한 인류학적 접근」, 『사회과학연구』 23(2010).
* 이 글은 2019년 4월 16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칼럼 [차이나 로그인]에 게재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