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명의 동남아시아 화인이 있다. 이 둘은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고, 대표적 동남아 화인 거상이자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친일활동을 했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시작된 정치적 혼란기에 이 둘의 친일행각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같은 친일활동임에도 찬사와 비난으로 평가가 나뉘는 무엇일까. 본 연재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호문호(2018년 10월호)와 임문경(2018년 6월호)에 대한 이야기다.
호문호(Aw Boon Haw 胡文虎)는 1882년 당시 영국령이던 동남아 버마(Burma)의 양곤(Yangon)에서 복건 객가(客家 Hakka)출신 화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객가출신의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져 온 ‘고(膏)’ 만드는 기술을 더욱 완벽히 발전시켜 대량생산 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1926년에는 싱가포르를 본격적인 사업의 전진기지로 삼고, 동남아시아 전체에 ‘호랑이 브랜드(虎標)’의 의약품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유통망을 1930년대 홍콩과 광주 등으로 확대하여 초국적, 초지역적 상업 유통망을 형성한 거부가 된다.
‘호랑이 연고(Tiger Balm)’로 불리는 의약품 외에 호문호가 적극적으로 진출한 영역은 언론이었다. 1929년에서 1951년 사이 그는 총 17개의 ‘성(星 싱가포르를 의미)’자 계열 신문을 출간하였다. 호문호가 발행하는 신문들은 중문과 영문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그 영향력은 당시 동남아 최고거부이자 ‘고무왕’으로까지 불리던 진가경(Tan Kah Kee 陳嘉庚)의 사업적 라이벌로 불릴 정도였다. 정통 복건(Hokkien 福建)계 ‘성골’인 진가경에 비해 객가출신인 호문호의 ‘지연’적 배경이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점과 그가 동남아 화인사회에서는 변방에 해당하는 버마에서 뒤늦게 싱가포르로 진출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호문호가 신문을 계속해서 다양하게 발행한 것은 그가 가진 상대적 한계를 여론형성을 통해 극복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실제 그는 전쟁기간, 혹은 전후에도 소유한 신문의 논조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거나 정치권과 협상 및 타협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는 사업으로 발생한 이익의 25%에서 60% 정도를 자선사업에 투입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주로 교육사업, 체육사업, 객가 소속의 사회단체가 그 대상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호표빌라(Haw Par Villa) 혹은 타이거 밤 가든(Tiger Balm Garden)이 있는데, 그의 이름인 호와 동생의 이름인 표(豹)를 붙여서 작명한 일종의 놀이공원이다. 각각 홍콩, 싱가포르, 복건성 영정(永定) 지역에서 1930-40년대에 개장하였다. 놀이공원이지만, 화교화인 자녀들에게 중화문명의 다양한 요소들을 소개하기 위해 지어진 교육시설로 볼 수도 있다. 내부에는 유교와 도교 신앙의 전설 및 민담을 소재로 한 코스들과 역사적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호표빌라는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가 특유의 강한 이익추구 성향이 그로 하여금 진가경의 사업적 라이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동남아 화교화인의 진정한 리더가 되지는 못하게 한 측면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그는 1929년 ‘성주일보’를 창간할 때에는 당시 국민당의 영수였던 장개석에게 제자(題字), 즉 창간 기념문을 요청한 반면, 1938년 홍콩에서 ‘성도일보(星島日報)’를 창간할 때에는 공산당의 주은래, 주덕, 엽검영 등에게 제자를 부탁한 바 있다. 이러한 행동이 사실 기업인으로서는 매우 당연한 ‘처세’였을지 몰라도 화교화인 대중들에게는 기회주의적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양분된 당시의 민심으로 볼 때 두 그룹 모두에 비난을 받을 소지도 있었다. 물론 진가경 역시 사업적 이익을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이러한 성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당시 동남아 화상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호문호에 대한 과한 비판은 억울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러한 평판이 극대화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친일행각이었다.
[사진 1] 호랑이 브랜드의 창업주, 호문호와 그가 발행한 신문 중 하나인 성주일보(Sin Chew Jit Poh 星洲日報)
1869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임문경(Lim Boon Keng 林文慶)은 말레이 지역(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수마트라, 자바 섬 등)에서는 ‘페라나칸’이라 불리는 3세대 복건계 화인이다. 페라나칸은 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이(Local born)’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현지인과 화교화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을 가리키지만, 광의로 해석하면 지역에서 태어난 외부인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18세에 이미 영국 여왕의 장학금(Queen’s scholarship)을 받고 영국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에딘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의사 수련을 받은 엘리트였다.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했을 때 백인들로부터는 중국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당하고, 청에서 온 중국인들로부터는 중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이주민으로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의술을 수련하고 1893년 싱가포르로 돌아온 그는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돌연 싱가포르 페라나칸 공동체 사이에서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주민 집단으로서 동남아에서 가지는 화교화인들의 지위와 처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고, 양쪽에서 차별과 견제를 받는 동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이유로 그가 20세기 초중반 벌인 활동들은 특정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매우 다양했다. 그는 1890년대 페라나칸 출신 동료 작가들과 함께 화교화인들에게 중화문명을 근대적 요소와 혼합하여 교육하려 노력하였다. 유학을 알리고, 한자를 공부하였지만, 동시에 변발을 자르고, 여성들에게도 공부할 것을 장려하는 등의 근대적 지식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이주민으로서 화교화인들이 ‘중화성(Chineseness)’을 분명히 가짐으로써 말레이 로컬 문화의 영향과 유럽 근대문명의 영향을 배제한 그들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던 듯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페라나칸에 대한 관심 정도에 머물던 그의 인식이 ‘중국’이라는 본국으로까지 확장된 것은 20세기 초반 청말의 유명한 개혁가 강유위(康有爲)와 손문(孫文)을 싱가포르에서 만나면서부터다. 이후 그는 교육적 관점에서 동남아의 화교화인 공동체와 본국의 교향(僑鄕)사이의 교육적 연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1921년 비슷한 관점을 지닌 친우 진가경의 초대와 손문의 제안으로 진가경이 세운 아모이 대학(지금의 복건성 하문대학)의 2대 총장을 16년 동안 맡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말레이 지역 화교화인들과 교향에 거주하는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던 경제적 활동(예금, 대출, 송금 등)을 근대화하려는 목적으로 1919년 6월 화교은행(華僑銀行)을 공동설립하게 된다. 그는 그 이전에도 1912년 화상은행(華商銀行), 1917년 화풍은행(和豊銀行) 등 복건(福建)계 근대식 금융기업의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한 바 있다. 화교은행을 비롯한 세 은행의 설립은 단순히 금융활동을 통한 이익추구가 목적이 아니라 근대식 금융 서비스의 부족으로 임금의 송금 및 교향(僑鄕)과의 금융거래에 어려움을 겪던 화교 및 그 가족들을 위해 설립된 측면이 강하다. 이후 이 세 은행은 대공황을 맞아 1932년 합병함으로써 동남아 최대의 화자(華資)금융기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외에도 해협식민지 화인들을 위한 각종 신문(天南新报)과 잡지(the Straits Chinese Magazine)의 발행에 참여하기도 하고, 싱가포르의 화인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Singapore Chinese Girls' School)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싱가포르가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발견된 지 100주년을 맞아 발행될 예정이었던 ‘싱가포르 100년사 편찬사업’에 관한 소식을 듣고, 친우이자 같은 페라나칸인 송왕상(宋旺相 Song Ong Siang)으로 하여금 ‘싱가포르 화인 100년사(One Hundred Years' History of the Chinese in Singapore)’를 저술하여 참가하도록 독려한 이도 임문경이었다.
[사진 2] 복건성 하문대학 전경. 하문대학의 시작은 1921년 진가경이 설립한 아모이 대학이다. 아모이(Amoy)는 하문(廈門)의 복건 남부지역 방언의 발음인 ‘애멍’이 영어로 발음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지명이다. 1937년 진가경이 국민당 정부에 대학의 행정권을 넘김으로써 국립대학이 되었다. 1970년대 하문대학으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계속해서 아모이 대학이라는 명칭을 유지하였다.
이토록 다양한 그의 활동은 단순히 ‘조국’을 위한다거나 중화의 문명을 보존하여 동남아의 화교화인들을 교화한다라고 하는 민족주의적, 혹은 중화주의적 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의 활동은 오히려 동남아, 특히 말레이 지역의 화교화인 공동체가 이주민 그룹으로서 말레이 문화와 서구 문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뿌리를 잊지 말자는 캠페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가 속한 화교화인 공동체 자체의 안정과 독립된 정체성의 보존에 있었다. 그는 오롯이 (그 교향의 가족들을 포함한) 화교화인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화교화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임문경은 당시 그들의 정신적 스승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런 임문경도 1941년 일본의 동남아 점령과 함께 시작된 일본 식민통치 아래 친일행위를 했다. 호문호 역시 일본의 전쟁수행에 동참하여 친일활동을 했다. 진가경은 전쟁발발과 동시에 수마트라섬으로 도망쳐 일본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모처에 숨어 1945년 일본 항복의 순간까지 꼭꼭 숨어있었던지라 친일이라는 굴레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은, 혹은 못한 임문경과 호문호는 친일행각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4】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호문호와 성주일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u_Wenhu2.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n_Chew_Jit_Poh_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