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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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을 보러 가는 듯한 만주여행 _ 유장근

만주에는 2007년 여름과 2016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2007년에는 주로 남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2016년의 여름에는 연길과 장춘, 하얼빈, 그리고 북만주의 대흥안령에 이르는 장거리 노정을 통해 만주의 이모저모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이곳에서 본 풍광과 사람들의 삶, 유적 등을 들여다보면서 실마리를 풀어나가 보자. 두 차례의 만주여행에서 아직도 강하게 남은 인상은 드넓은 평원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이었다. 2007년 여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단동에 도착한 다음 내가 처음 본 것은 옥수수로 뒤덮인 만주벌판이었다. 단동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시작된 옥수수밭은 환인, 통화, 집안에 이어 다시 단동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간간히 벼논이나 수수밭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약간의 변화를 주는 장식품처럼 느껴졌다. 마치 옥수수밭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조차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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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단동 인근의 농촌마을 옥수수 풍경



옥수수밭은 동네 앞 뿐만 아니라 산천경개를 모두 감싸 안은 듯이 펼쳐져 있었다산지, 개울가, 동네 앞뒤길가 등등. 특히 집안(輯安)에서 단동으로 오는 길목에 위치한 압록강변이나 혼강(渾河)변의 그것은 장관이었다. 산림 보호 지역 외에는 모두 옥수수밭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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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 풍경. 마을 주변의 산비탈 밭에는 모두 옥수수를 심었다.



단동에서 환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보게 된 어느 동네 풍경은 참으로 낭만적인 것이었다. 깨끗한 하늘푸른 산,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붉은 기와집,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옥수수밭은 우리가 본 전형적인 만주의 마을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옥수수밭 풍경이 단동이나 압록강변 혹은 집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림에서 연길로 가는 도중에 보게 된 마오얼산 부근의 옥수수밭이나 장춘 일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돈화에서 발해의 용천부 유적이 있는 흑룡강성 영안현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드넓은 북만주의 평원에도 옥수수밭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흑룡강 지역의 일부에서는 그 사이사이에 벼농사를 짓는 곳이 있었으나 주 작물은 옥수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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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2004년 여름의 귀주 여행 때 보았던 옥수수밭. 석회 암산을 깎아서 옥수수밭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대략 18세기의 이주 물결을 따라 옥수수가 많이 재배되었다.



그렇다면 옥수수 경작지의 풍경은 언제쯤 만들어진 것일까. 중국에 옥수수가 도입된 시기는 16세기 중엽쯤, 곧 명대 중후기이다. 초기에는 주로 운남 지역에서 재배된 것 같은데, 19세기에는 사천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북상의 물결을 탄 것 같다. 이주와 개간의 시대였으니까. 만주 남쪽 지역에도 이미 17세기에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화북과 만주지역에서 주요 작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였다. 특히 만주국(1932-1945) 시기에 크게 확산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민공화국 시대, 그 중에서도 개혁 개방 이후 농촌에 시장화 바람이 불면서 오늘날과 같은 옥수수 가득한 풍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예컨대 옥수수는 1949년에 1,380만톤에서 1998년에 13,295만톤으로, 면적당 생산량도 1952년에 1,341킬로그램(헥타아르당)에서 1998년에 5,268킬로그램으로 증가하였다. 2014년의 세계옥수수 생산량은 총 69천만톤 정도였는데, 이 중 중국과 미국의 생산량이 절반을 차지하였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외국의 옥수수 중에서도 중국산이 약 60% 정도이니 만주 옥수수는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중국 정부는 1990년대 이후 식량 증산의 일환으로 옥수수 경작을 권장하였고, 농민들도 이를 따르면서 만주 천지를 옥수수 밭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흑룡강 일대에는 옥수수연구소를 비롯한 국가의 연구기관이 옥수수에 관한 품종개량과 재배기술을 발전시키자는 식량공정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게다가 길림성에서 흑룡강성에 이르는 지역은 비옥한 중국의 흑토지대이다. 옥수수가 잘 자랄 수 있는 토질인 셈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옥수수의 최대 산지는 흑룡강, 길림, 그리고 산동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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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산동의 태산에 갔을 때 보았던 농민의 옥수수 수확 장면.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옥수수의 키는 성인 키의 두 배가 넘을 정도로 컸다. 옥수수 역시 팔뚝만큼이나 크면서도 맛이 있었다. 예컨대 환인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휴게소에서 사먹은 옥수수가 그랬다.


옥수수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다. 고인이 되신 장모님으로, 고향은 평북 정주다. 생전에 고향을 못 잊어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옥수수밭을 특히 그리워하셨다. 이것은 고향의 맛이기도 하거니와 그 분이 일시 살았던 만주 통화(通化)의 향수이기도 하였다. 통화에서 당신과 장인은 젊은 시절을 보냈고 아들 둘을 얻었다. 통화는 백두산으로 여행할 때,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며 일제 시대에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 과거에 장모님이 왜 그리 옥수수를 그리워하셨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당신은 해방 뒤 남편의 고향인 경남 거창 땅으로 이주한 뒤, 큰 밭에 마음껏 옥수수를 가꾸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고인이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경남의 토박이들은 옥수수를 밭에 심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옥수수란 기껏해야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았다정주나 만주 지역 사람의 사고와 너무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의 고향인 충청도에서도 옥수수란 그저 주전부리 정도였지, 식량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식용작물에 대한 지역간의 차이는 남북의 기후 차이만큼이나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여행 중에 보게 된 것이지만, 많은 농가에서는 집집마다 옥수수를 창고에 넣어 말리고 있었다. 들에서는 아직도 푸른 대에서 옥수수가 팽팽하게 익어가고 있는데집에서는 또 집대로 고상식 창고라고 할 수 있는 곳간에 그득히 채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저장 방식은 중국 서북 지역의 그것과 달랐다. 섬서성의 연안이나 감숙성의 난주와 같은 서북 지역에서는 창고가 아니라 마당에 세워놓은 기둥이나 처마 쪽에 마치 볏단 쌓은 듯이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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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만주 농가의 고상. 옥수수나 기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곡식 창고가 이미 고구려시대부터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부경이 그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예전에는 옥수수가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었던 기장이나 조, 콩 등을 저장하였을 것이다. 고구려 사람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20세기 이전까지 옥수수에 대한 그리움은 없을 것이다. 이런 풍경을 보면 사람들의 먹을거리나 보관방법은 오랫동안 강고하게 지속되는 관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은 소농 시절의 이야기이다. 대규모 농장에서 기계식으로 수확하는 오늘날의 옥수수밭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관가마니에 옥수수를 잠시 보관한 다음 대형 트럭으로 이것을 실어 날라 선적을 하기 때문에 과거의 유산들은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북과 만주의 밭작물 재배라는 오랜 농업관행은 기후가 뒤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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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만주지역의 옥수수 수확 풍경. 대규모로 생산하다 보니 예전의 농가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20】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