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황제’와 더불어 ‘소공주’는 개혁개방시기 중국 1자녀 정책의 상징이다. 부모들은 하나밖에 없는 혈육에게 아낌없는 정성을 쏟아 부었고 행여나 다칠세라 유리그릇 다루듯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소황제와 소공주는 거침없고 이기적이며 참을성 없고 버릇없는 세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자녀를 하나만 낳다보니 부모에게는 아들 못지않게 딸도 더없이 귀한 존재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도시와 농촌의 경우가 다르게 나타난다. 조사에 따르면 도시에서는 여성 고학력자가 빠르게 증가한 반면, 농촌의 빈곤지역에서는 여전히 문맹이 존재하고 그중 약 3분의 2가 여아라고 한다. 또 여아는 여전히 남아에 비해 차별을 받고 남자 형제가 없는 여아가 교육을 더 오래 받는다고 한다.1) 이는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이 농촌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전통시기 여아는 집안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당시 여아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차별 현상은 여아 유기 혹은 살해였다. 남아만큼 농사에 힘도 쓰지 못하면서 ‘밥만 축내는’ 여아는 가난한 가정의 골칫거리였다. 먹을 것이 넉넉하다면야 오물오물 딸의 입에 들어가는 양식이 뭐 그렇게 아깝겠냐만, 늘 가난한 것이 문제였다. 소중한 어린 생명을 죽이지 않고 양식도 축내지 않으면서 얼마간의 돈을 부모 손에 쥐어주는 것, 그것은 딸을 남의 집에 동양식(童養媳)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곧 어린나이에 시집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민며느리제라는 비슷한 관습이 있었다.
혼인할 때는 신랑 집에서 얼마간의 혼인비용(聘禮)을 보내온다. 즉 ‘신부 값’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것이니 신부 값은 저렴했다. 보통 신랑측에서 보내온 혼인비용의 범위 내에서 신부측에서는 혼수를 준비하게 되는데, 어린 신부는 혼수비용도 적게 들었다. 동양식으로 가는 여아는 대체로 아동기의 여아지만 심지어는 두세 살의 영아인 경우도 있었다. 동양식은 7, 8년이 지나면 웬만한 집안일을 거들 수 있고, 신랑이 신부보다 어리다면 신랑을 업어서 도맡아 키우기도 했다. 여아의 부모로서는 적기는 하지만 얼마간의 신부 값을 챙길 수 있었고, 신랑 측에서는 저렴한 신부 값을 치루고 소소한 집안일을 부릴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신부를 좋아했다.
동양식은 전통시기 전국적으로 행해졌지만, 특히 근대에 이르기까지 강서성, 복건성, 대만성, 광동성 등, 북부 내륙지역보다는 남부 연해지역의 빈곤층에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유행했던 관습이었다. 민국시기의 『민사습관조사보고록』에 의하면, 청말민초 복건의 장정(長汀), 상항(上杭) 및 안계(安溪) 일대는 동양식이 민간 혼인 비율의 10%를 차지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30%에 달하기도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광동성 객가 사회에서는 결혼 전에 동양식을 거쳤던 부녀의 비율이 80-90%인 현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복건지역에서 동양식의 관습이 유행했던 것은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일찍이 북방사민의 대규모 이주로 이루어졌던 복건사회는 해상무역을 통해서 경제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던 곳이다. 당시 이민사회는 국가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민 집단은 자신의 새로운 터전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했다. 이는 혈연집단의 결속을 강화시켜 종족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인구증가로 인한 종족별 경쟁도 치열하여 종족 간의 계투(械鬪: 집단투쟁)로 이어졌다. 종족의 계투와 해상무역의 위험성은 복건성을 늘 건장한 청년을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토착민과 끊임없이 계투를 통해 자신의 터전을 확보해야했던 광동지역 객가의 이민사회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늘 건장한 청년을 확보하기 위해 양자나 양녀를 들이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3세 이하의 유기된 소아를 데려다 양자로 키우는 것이 여유 있는 계층에게는 일종의 관습이었고 법으로도 규정되어 있을 정도였다. 유기된 어린 남아를 입양하는 것은 빈민의 구제 혹은 자선의 의미도 있었지만, 아들이 많은 것을 복으로 여겼던 중국인들에게는 노동력의 확보 면에서도 잠재적인 실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기된 어린 남아뿐 아니라 어린 여아를 양녀로 들이는 관습도 있었다. 명청시기 가난한 가정에서 여아를 유기하는 현상은 중국 남부 연해지역에서 많이 나타났다. 복건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초래되어 심각한 사회 불안정 요인이 되었다. 여아 유기로 인한 심각한 남초 현상은 혼인 적령기의 신부를 구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동양식은 안정적으로 신부를 공급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어린 여아를 양녀로 키우다가 성장한 후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시킴으로써 장래에 대를 잇고 양로나 부양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정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것이 동양식이 하나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이다. 만일 아들이 없다면 양녀를 들이고 양녀가 혼인할 나이가 되면 양녀를 통해서 데릴사위를 들일 수 있었다. 즉 양자와 양녀를 들이는 방법으로 종족의 계투와 해상무역에 종사할 건장한 남자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민사습관조사보고록』 중 복건성의 여러 현에서 보고되어 있다. 예를 들어 순창현(順昌縣)에서는 “아들이 없는 경우 우선 묘식(苗媳, 즉 동양식)을 양녀로 삼고, 장자 혹은 데릴사위로 남편을 맞아하게 하여(招贅)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고 보고되어 있다. 복건 중부 하류 일대의 중등 이하 가정에서는 어린 신부를 양녀로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고되어 있다. 보전현(莆田縣)에서도 “아들, 딸이 있건 없건 같은 성(姓) 혹은 다른 성의 어린 여아를 사서 양녀나 동양식으로 삼는다. 성장을 기다렸다가 그 양부모는 자기 아들이 있건 없던 같은 성(姓) 혹은 다른 성의 남자를 택해 데릴사위로 삼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동안현(同安縣)에서도 “어릴 때부터 묘식을 기르고 성장하면 합방(合歡)하게 하거나 여자 집에 돌려보내 신부로 다시 맞이하게 하는데, 빈한한 집이 대부분 그렇게 하니 향촌에 무척 많다”라고 하여 결혼 관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식의 혼인방식은 혼인 당사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혼인생활이 되지 못했다. 인류학자 Margery Wolf의 연구에 의하면, 동양식으로 맺어진 부부는 대개 불행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훗날 혼인할 사이라는 것을 어린 신랑, 신부가 이해할 리도 없고, 어렸을 때 함께 자란 이들은 남매나 다름없었다. 근친 간에는 이성으로서의 신비감이나 성적 감정이 희박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합방을 하라고 하면 이를 거부하고 신부가 도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들은 상당한 감정적인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복건성의 산골마을에는 동양식으로 혼인을 한 여인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아직까지 전족을 한 여인들도 있다고 하니 관습의 지속성과 생명력에 새삼 놀라게 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중국의 최첨단 산업은 세계 최고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중국의 도시와 농촌은 여전히 몇 세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는 순간이다.
【관습과 중국문화 16】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Lee Ming-Hsuan이 중국 9개성 4,400가구의 아동을 대상으로 교육과 건강을 조사 분석한 결과, 남자 형제가 없는 가정의 여아가 키가 더 크고 교육을 더 오래 받는다고 한다. Ming-Hsuan Lee, “The One-Child Policy and Gender Equality in Education in China: Evidence from Household Data”, Journal of Family and Economic Issues 33, 2012, pp.41-52.
[참고문헌]
손승희, 「근대중국의 異姓嗣子 繼承 관행」, 『중국근현대사연구』 57집(2013).
前南京國民政府司法行政部編, 『民事習慣調査報告錄』, 中國政法大學出版社, 2005.
陳支平, 『近五百年來福建的家族社會與文化』,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11.
Arthur P. Wolf and Chieh-shan Huang, Marriage and Adoption in China,
1845-1945,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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