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년 전인 2008년 중국에서는 두 번의 커다란 재앙이 발생했다. 하나는 자연계의 재앙인 원촨(汶川) 대지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싼루(三鹿) 멜라닌 분유사건이었다. 원촨 대지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싼루 분유 사건은 달랐다. 공식적 자료에 의하면 이 분유를 먹은 영유아 6,244명이 병원을 찾았고, 1,327명이 입원했는데 그 가운데 3명이 숨졌으며 158명의 아이들이 심각한 신장결석 증세를 보였다. 그런데 얼마 후 당시 유럽연합 통상담당 집행위원이었던 영국의 맨덜슨이라는 인물은 중국 방문 중 티브이가 중계하는 가운데 중국 우유를 마시는 쇼를 벌렸다. 아마도 중국 우유에 대한 신뢰를 표현함으로써 중국인들의 호감을 이끌어 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당시 총리였던 원자바오(溫家寶)에게는 감동적으로 비추어졌으나, 일주일 뒤 맨덜슨이 신장결석으로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그를 싫어하는 영국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멜라닌우유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보통사람들의 안전에 국가와 당이 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대재난 앞에 단결했던 중국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당에 의해 잘 관리되는 나라라는 인상을 주었던 중국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크리스마스 반대운동 <출전 : 바이두>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8년이 지나가는 이 12월에 ‘몰락해가는 제국’ 미국과 ‘제국을 꿈꾸는’ 중국이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맹목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당국체제를 절대화하고 경제적 발전을 통해 제국을 건설하는 전략을 취해왔던 중국은 트럼프의 도발로 시작된 통상마찰로 인해 위기에 처해있다. 일대일로 등의 급격한 팽창정책에 대해 자국 중심적으로 이해해 온 중국의 대중은 그동안 잠재되어있던 반미정서를 폭발시킬 계기를 찾게 되었다(사실은 모택동주의자들을 비롯한 좌파들에게 반미정서를 대대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활동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전투적 민족주의는 심지어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표출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부의 문제들을 호도하기 위해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는 전투적 민족주의가 일본에서도 부활했던 것이다. 가상 적을 만들기 편리했던 냉전시대의 보수집단들이 냉전체제 해체 이후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일본 보수주의자들은 한국과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심지어 사실을 조작하거나 외국 사법부의 판단까지 이용하면서 반한감정을 자극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민당의 정치 전략은 동아시아 정치지형의 장래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덧붙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경악할 만큼 빠르게 진행되던 남북화해와 한반도 비핵화논의가 정체되고, 그것이 가져온 희망이 북미의 정략적 태도로 퇴색되고 있다. 그 희망의 자리에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죽음이 청년실업문제 등과 함께 들어서 있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심각하게 침식하고 있다.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과 슬픔 그리고 증오에 기초했던 과거 정권들이 붕괴되고 희망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생각은, 2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가 마치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처럼 아득히 느껴질 정도로 모호해져가고 있다.
사실 최근의 동아시아 정치 전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요소는 트럼프라는 인물의 존재였다. “미국의 최대 안보위협은 트럼프 자신이다”라는 말처럼 세계를 오직 자신의 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대중들의 증오’를 기반으로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트럼프의 즉흥적 행태는 국제정치상황을 불확실성의 늪에 빠트렸다.
이러한 현실은 세계적으로 이익 중심의 민족주의가 범람하는 결과를 낳았다. 진지한 좌파였던 조지오웰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민족주의(실제로는 자기집단 중심주의를 가리키는 표현)에 대한 긴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족주의는 세력에 대한 갈망이되, 이 갈망은 자기기만으로 완화될 수 있다. 모든 민족주의자는 극명한 거짓을 범하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조지 오웰, 민족주의 비망록)
정치인들 특히 공익을 내세우되 이익에 더 치중하는 정치집단이 민족주의를 즐겨 이용하는 이유는 민족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배하는 자의 프레임에 모든 것을 용해시켜 자신의 허위주장을 정당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치 상황의 전개는 정치제도나 법규가 지도자들의 폭주, 타락한 민주주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준다. 사실 어떤 정치체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것은 체제이론이 아니라 그 체제가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실천이다. 역사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정책적 선택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깔끔한 해설과 논리적 구조를 이용해서. 그러나 특정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체계가 아니다.
20세기 말의 냉전체제 해체는 살아남은 다른 쪽에도 위기-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래서 제3의 길이 제기되고, 20세기 말엽 제3섹터로 명명된 시민사회의 직접민주주의 열풍은 죽어가는 민주주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경쟁이 ‘가치의 대결’이 아니라 ‘욕망의 대결’로 바뀐 상황에서 협의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나 숙의(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discursive democracy)등을 통해 현실 민주주의를 ‘재(再)민주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화된 의론들은 우리가 통상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치체제의 한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사회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했다. 현실 속의 재민주화 논리는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치유하는데 현실적 도움을 주기는 쉽지 않다.
전통적 민주주의 체제가 가져온 문제점들, ‘승자독식’, ‘다수의 관점이 항상 옳다’는 환상 등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 위에서 언급한 제도들이 고민되었으나, 현실 속에서는 시장과 욕망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어서 합리적 결론에 대한 희망을 갖기 어려웠다. 우선 숙의민주주의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항상 합리적 지식에 대해 수용적이어야 하며, 숙의과정에서 공동체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결정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이익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관점에서 접근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지만, 정말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에서 ‘숙의’가 합리적으로 진행되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해 당사들의 참여로 판단에 대한 책임을 전제로 진행되는 그러한 회의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가 사실은 소수 전문가의 수사학적인 논리나 조작된 통계자료 등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말하자면 숙의 과정이 하나의 이벤트로 전락하고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실상 일부 전문가나 입담꾼의 장식물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았다.
병든 혹은 전투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공존의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의 각성과 제대로 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성숙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그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경우도 베트남 축구에 대한 과도한 관심, 난민 문제 등에서 나타나는 대립 등으로 추정할 때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지 않다. 시장과 국가의 실패가 명백해질수록 전투적 민족주의는 다른 여러 가지 얼굴로 대중을 유혹할 것이고 동아시아 정치지형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길을 만들어가야 할까.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이 즈음에 다시 지난 촛불의 추억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김태승의 六十五非 7】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