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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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비천상과 문화융합 _ 유장근

중국 서북부의 돈황은 최근에 한국인에게 각광을 받는 관광지가 되었다. 물론 돈황 자체가 안고 있는 매력도 있지만, ‘실크로드라는 일본 방송의 다큐물이 그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고 본다. 더구나 한국인이 세계에 남긴 발자취를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만들어진 글로벌 한국바람도 돈황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된 이유일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곳이 한족 세계의 변방이지만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배운 까닭에 위에서 열거한 여러 이유 못지않게 절실하게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였다. 중국 체류의 마지막 여행지로 돈황을 꼽은 이유다.

 

한 겨울의 돈황은 말 그대로 삭막한 겨울바람에 모래가 섞여 날라 들어오는 척박한 도시였다. ‘오아시스라는 것이 저런 곳이구나라는 느낌도 강하게 다가왔다. 청해성의 한복판인 거얼무에서 하루 종일 북향하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이 돈황이었는데, 그 아름다우면서도 황량한 사막의 한 복판에 꿈과 같은 돈황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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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섬서성 돈황의 막고굴 전경. 전면에 보이는 사각형의 문마다 하나의 석굴이 있다.


그러나 돈황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은 비천(飛天)의 도시 돈황이라는 펼침막이었다. 마침 비천 축제가 막을 내린 참이었다. 돈황이라고 하면 저 유명한 막고굴이 상징일 터인데, 비천 축제라니. 기대에 좀 어긋나는 느낌이었고, 또 돈황의 상징을 비천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런데 여러 개의 막고굴을 구경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도시가 비천을 상징물로 삼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막고굴의 수많은 벽화 중에서 비천상이 제일 많았던 것이다. 어찌 보면 벽화는 비천을 묘사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비천들이 막고굴의 벽화를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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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막고굴 벽화중의 한 장면.

당나라 때 도독부인과 그 딸들이 시주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이러한 귀중한 유산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막고굴의 벽화 모사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조선족 출신 화가 한낙연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한낙연은 1946년에 이미 과일바치는 비천이라든가, ‘당비천’, ‘송비천과 같은 여러 시기의 비천상을 그려왔고, 키질 석굴의 비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곧 돈황 벽화를 본 뒤 그 매력에 빠졌으니, 그 중에서도 비천에 관심을 가진 초기의 화가였던 셈이다.

 

사실 막고굴의 전시판매장에 들어가니 다양하고 멋진 불화도 많았지만, 오히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각종 형상의 비천화였다. 결국 큰 돈을 들여 막고굴의 천정화 모사도와 『막고굴』이라는 도록을 사들고 오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신라시대 성덕대왕 신종에 그려진 날렵하고 여성적이면서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비천상을 보고 비천을 이해해 왔다. 또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에 새겨진 비천상도 아름답고 신비하다고 배웠다. 허나 돈황의 비천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우물안 개구리 신세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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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한락연이 그린 막고굴의 당비천상. 1946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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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

두 사람 모두 구름위에서 천의를 입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노래 부르는 신은 없는 셈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비천이란 건달바와 긴나라의 화신으로건달바는 천가신으로긴나라는 천악신으로 의역되어 왔다그야말로 노래와 음악의 신들인 셈이다고대 인도의 신화 중에서 오락신과 가무신이 부부가 된 데서 유래하는데이들이 불교에 흡수되어 8부신중의 하나가 되었다이 중 건달바의 임무는 불국에서 향기를 뿌리고 부처를 위해 꽃밭에 머물면서 천궁을 나는 것이고긴나라는 그곳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춤추지만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뒤에 이 둘은 합하여져 함께 하늘을 나는 것으로 변하였다그러니 어떤 비천은 남성으로또 어떤 비천은 여성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의 주된 역할은 부처의 탄생, 출가, 설법, 그리고 열반할 때, 항상 수행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꽃을 뿌리면서 축원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좋다.

 

석굴의 천정으로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막고굴의 천정은 무늬로 장식한 천정으로 보통 조정(藻井)이라고 한다이 중 천정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제329호굴 천정의 비천(飛天)이 유명하다.  

 

내가 그곳에서 산 천정화는 407호굴의 천정 그림을 모사한 것이라지만그와 꼭 같지는 않다. 이 모사 천정화는  토끼 세 마리와 많은 비천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3토비천조정(三兎飛天藻井)’이라고 부른다천정화의 중심부에는 검은 색과 비파색의 8잎 연꽃이 2중으로 그려져 있으며화심(花心)부에는 토끼 3마리가 서로 쫓고 쫓기는 듯한 자세로 박력 있게 묘사되었다특히 토끼는 3마리인데 귀 역시 3개 뿐이다그럼에도 한 마리당 두 개의 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귀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정삼각형이 푸른 하늘에 떠서 우주를 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원과 삼각형그리고 그 외곽에 구성된 4개의 4각형이 각각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이 그림의 특색이다

 

2중 연꽃잎의 외곽에는 한 면에 2명씩 모두 8명의 비천이 구름 속에서 역동적으로 날고 있다토끼와 같은 방향이다네 명의 비천은 붉은 색 치마에 날아갈 듯한 천의를 둘렀다붉은 색 바탕에 검은색 테두리를 두른 치마가 마치 훨훨 타오르는 불과 같다반면 나머지 네 명 중 어떤 이는 옷도 없는 것처럼 검은 색 몸뚱이만 있는 듯이 그려져 있거나리본을 든 기계체조 선수처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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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407호 석굴 속의 삼토비천천정화 원형.

이 천정화에는 아래의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맨 가에 비천상이 그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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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내가 구입한 407호 삼토비천천정화 모사도

 

동아시아의 비천상은 날개로 나는 서양과 달리 저처럼 천의를 통해 날고 있는 것이다이들은 푸르고 회색 빛 도는 구름과 갈색의 산초록의 나무 사이에서 유영하고 있다그 외곽에 다시 꽃무늬가 3면에 걸쳐 같은 양식으로 그려져 있고삼각형의 도상이 다시 둘러서 있다사람 같기도 하고산 같기도 하지만당시에 사온 『막고굴』이라는 도판책을 들여다보아도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그저 짐작할 뿐이다그 밖에 다시 한 면에 네 명의 비천상을 그려 넣었다하지만 여기에는 연꽃 잎 외곽의 비천상과 달리 구름이 없다.

 

그렇다면 왜 토끼가 천정의 한 복판에 그려져 있는 걸까참으로 궁금한 대목이다해설도판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다정확하지는 않겠지만중국의 신화에서 토끼는 장생불사를 상징한다항아(姮娥)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받은 불사약을 남편인 예(羿몰래 혼자 먹고 달로 도망갔다는 신화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돌아가는 토끼가 윤회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도 맞는 듯하지만불가에서 윤회의 상징은 보통 수레바퀴로 표현되는 것을 상기한다면 왜 굳이 그걸 버리고 토끼로 표현하였는지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해석한 것처럼 제곡 시대의 항아 전설이 후대로 갈수록 윤색되면서 계수나무와 토끼, 떡방아들이 산입되고 그것이 저와 같은 삼토비천으로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나저나 막고굴의 천정은 매우 높았다이 높은 곳에 저처럼 빈틈없이 수많은 비천과 꽃삼각, 사각의 도상을 정확하게 그려 넣은 당시의 화가는 누굴까이 황량한 사막에서 석굴을 만들고 거기에 불상을 조영하고 벽화를 그렸던 당대인들의 불심을 조금이나마 떠올려 본다.

 

내가 사온 천정의 비천상 그림은 수나라 때의 것이지만, 사실 비천상은 비천의 흥기시대라고 하는 북량에서 북위에 이르는 170여년 사이에 다양하고 변화가 많은 작품이 그려졌다. 이를 불교의 천인과 도교의 우인, 서역의 비천과 중국의 비선(飛仙)이 융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비천이 출현하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 수당대로 오면 원형을 벗어나 좀 더 자유스러운 형태의 비천상이 출현하지만 민족적 융합은 점차 줄어들면서 중화주의적 이미지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초기의 벽화에서도 그러한 양상이 드러난다. 검은 색의 피부를 가진 석가의 제자나 눈이 크고 코가 우뚝한 서역인들이 부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막고굴의 문화란 특정 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돈황 주변에 뒤섞여 살던 여러 민족, 심지어는 인도지역민의 양상도 벽화와 비천에 녹아들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 당국은 막고굴을 중국의 유산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벽화나 비천을 제작한 당시대의 보편성과 국제성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돈황 문화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는 물과 같은 관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8】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