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호라는 인물이 있다. 그리 잘 알려지진 않은 독립운동가지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국가보훈처 사이트에서 검색도 된다. 1884년 1월 2일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이나 서울 종로에서 주로 활동했던 듯하다. 1907년 진남포 이웃에 사는 친구인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몽골지역 분할 및 침략에 대해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당하기 직전, 정대호는 안중근의 부탁을 받고 진남포로부터 의형제의 가족들을 하얼빈 수분하 지역으로 안전하게 호송하였다. 그로 인해 의심을 받고 일본 경찰에 의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1916년 천진으로 다시 건너간다. 그러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1921년에는 김규식, 여운형, 여운홍, 조동호, 민병덕, 서병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발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비교적 평범한 독립운동가의 인생을 살던 그의 인생이 다시 한 번 크게 출렁이게 되는 계기는 1926년 쑨원의 조언으로 느닷없이 싱가포르로 건너 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게다가 쑨원이 소개해 준 곳은 도남학교(道南學校)라는 복건계 화교화인 교육기관이었다.
도남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는 지금도 여전히 싱가포르에 있는 초등교육기관이다. 아마 초등 자녀를 둔 싱가포르 학부모들이 가장 선망하는 학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금의 위치와 학교 건물들은 현대에 들어 새로 이전한 것이고, 예전 건물은 현재 '페라나칸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유럽풍의 아담하고 세련된 건물이다.
[사진-1] 싱가포르 페라나칸 박물관 건물. 이 건물이 과거에는 그대로 도남학교로 쓰였다.
1906년부터 그 설립을 논의하면서 조금씩 학생들을 받아들였지만, 그 본격적인 시작은 학교 건물이 완공된 191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최고액 출자자이자 재단 이사장이 탄카키(Tan Kah Kee)이고, 첫 번째 졸업생들 가운데 리콩치엔(Lee Kong Chian)이 있다는 사실부터가 호키엔(Hokkien 복건인) '성골'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둘 모두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 화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자, 각각 복건 남부지방(閩南) 출신 중국계 이주자들을 의미하는 호키엔 커뮤니티의 1대, 2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2대, 3대) 리더들이었기 때문이다. 매우 중요한 인물들인 것이다. 심지어 리콩치엔은 이후 탄카키의 사위가 되기도 한다. 애초에 호키엔 커뮤니티의 결속을 다지고 후손을 제대로 교육시켜서 호키엔으로서의 지역적 정체성을 보존하자라는 취지로 설립된 호키엔 교육기관이었으므로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고작 그것뿐이라면 이 도남학교가 싱가포르 화인 교육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화교화인들이 중화인 혹은 대륙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각 지역별 화인 커뮤니티들(싱가포르의 경우 복건, 광동, 조주, 객가, 해남)의 경우 서로 사이가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주 나빴다. 20세기 초중반까지도 광동주류의 홍콩 화교상인들과 복건중심의 싱가포르 화교상인들이 어느 행사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언어가 달라 대화가 거의 없었고,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 때문에 원한을 품고 돌아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거슬러 올라가 1850년대 중반 즈음에는 쌀 가격을 둘러싸고 싱가포르 호키엔 그룹과 광동 산터우(Swatow)출신의 싱가포르 화인그룹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약 4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물과 기름처럼 함께 있으나 섞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도남학교가 갖는 교육사적인 혹은 화교화인사 측면에서의 의의는 신해혁명 이전 1909년, 최초로 非호키엔 화인 그룹의 학생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신해혁명 이후 1916년에는 역시나 최초로 만다린, 즉 중국 북경어를 교내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각 지역 간 상이한 지역문화를 초월하여 통합된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교육을 통해 이식시켜 주어야 된다는 탄카키 특유의 교육철학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직접적인 영향이든 혹은 간접적인 사상의 전파이든 간에 쑨원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일단 1900년에서 1911년 사이에 쑨원이 싱가포르에만 아홉 차례 방문하였다는 점과 탄카키 자신이 쑨원의 주요 후원자이면서 그가 조직한 동맹회의 일원으로서 1911년 신해혁명의 주요 지지자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게다가 외부인에 폐쇄적인 화교화인 커뮤니티의 한 축인 초등교육기관의 교사로, 연고도 없고 스펙도 모르는 조선인을 소개시켜 준다는 것 자체가 쑨원이 도남학교 및 싱가포르 화교화인 커뮤니티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1926년 싱가포르라는 낯선 열대의 이국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 정대호가 도남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폐쇄적인 화교화인 사회에는 잘 적응했는지, 어떠한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과문한 관계로 관련 연구 역시 찾지 못했다. 다만 그가 1940년 8월 6일 싱가포르에서 사망하였고, 1990년 7월 2일 그 유해가 국내로 봉환되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3남이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원상 씨에 대해서는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6년 전 싱가포르의 한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싱가포르 초대 한인회장을 지낸 정원상이라는 분이 별세하셨으니 조문하실 분은 조문하러 오시라고 알린 공지사항이 그 단서였다. 정대호의 3남으로 191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였으니 혹시 1926년 정대호가 쑨원의 조언에 따라 싱가포르로 건너올 때 함께 정착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시기에 건너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전자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싱가포르에 쭉 살다가 1963년 재싱가포르 한인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지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단체가 바로 현재 싱가포르 한인회의 전신이다. 정원상씨는 2012년 향년 103세로 별세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호기심에 상주의 이름이 Walter Cheung H.Y 라고 되어 있기에 혹시나 검색해 봤더니 놀랍게도 누군가의 블로그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영국에 유학하고 있던 한 목회자가 2006년 Walter Cheung이라는 영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계 영국인을 런던에서 만났는데,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지만 그 자신이 독립운동가 정대호의 손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소개해 주었는데 돌아가시기 전 97세의 정원상씨였다. 한국땅, 한국인을 굉장히 그리워해 처음만난 한국인임에도 굳이 데리고 가서 아버님에게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필자도 언제가 기회가 되어 런던에 가게 되면 Walter Cheung을 꼭 찾아볼 생각이다.
비록 한국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도마 안중근 의사의 의형제 정도로 한 꼭지 정도만 할애되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독립운동가였다고 해서 정대호와 그 후손들의 삶이 덜 비극적이었거나 가치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운동가들이 상해, 미국, 만주 등지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벌일 때 정대호는 그 홀로 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먼 이국땅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광복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에 이어 한국인이 거의 없었을 낯선 싱가포르 땅에서 한인회를 조직하여 이국땅에서나마 동포들의 해외 적응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월터라는 이름의 손자는 영국인이 되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런던에서 그를 만나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과 순리대로 라면 그대로 한국인이 되었을 월터 씨를 영국인의 운명으로 이끈 식민, 제국, 독립운동이라는 근대의 유산들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같은 식민지 이후를 살고 있는 한인후손으로서 궁금한 점이다. 또한 화교화인연구자로서 가장 알고 싶은 것은 과연 정대호와 그의 아들이 싱가포르의 화교화인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으며, 호키엔 교육기관인 도남학교에서의 실질적 활동은 무엇이었는지 등이다. 후에 기회가 되어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고 성과가 나와 ‘한국-동남아 화교화인 관계사’라는 영역이 개척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8】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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