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간
10월호
인쇄 닫기
시안 농민에게 받은 위조지폐와 옌안의 토굴집 _ 유장근

중국사 연구자라서 그럴까. 가보고 싶은 곳이 참으로 많았다. 베이징 일대나 상하이 뿐만 아니라 서북의 고원, 서남부의 소수민족지역, 저 서쪽 끝의 신장이나 드넓은 만주 벌판 따위 모두가 가서 발로 걸어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곳들을 잠깐잠깐 맛보기로 다녀왔지만, 사실 중국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건 평생의 업으로 삼아도 못다 할 정도로 중국은 넓고 다양하다. 대여행가라고 평가받는 명말의 쉬샤커(徐霞客)처럼 서재를 떠나 30년 넘게 전중국을 다닐 수 있다면, ‘내가 좀 다녀봐서 아는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당시에 우리 부부가 잡았던 여행 목표는 서북의 시안과 옌안이었다.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지만 사실 척박한 황토지대이다. 200610월 중순의 가을 한복판에 시안의 시내보다는 우선 화산에 들렀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는 게 더 어려울 듯 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화산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진시황릉에도 들렀는데, 웃지 못할 일이 능 구경을 마친 뒤에 벌어졌다. 이곳 농민에게 애기호박만한 석류를 산 것이 발단이었다. 우선 크고 맛이 있었다. 또 농부가 엄지손톱으로 석류의 배꼽을 따서 속살을 꺼내먹는 방법도 알려줬다. 그에 반해 몇 개를 더 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백원 짜리를 주니 50원짜리 한 장과 십원짜리 몇 장을 거슬러 준 것 같다.

 

 

유장근1.jpg

그림 1. 시안 일대의 특산인 석류, 이렇게 크고 맛난 석류는 처음 보았다. 이걸 사고 거슬러 받은 돈이 위폐였다.


이제 시안의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서 옌안행 버스만 타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하루에 많지 않는 옌안행 버스가 시동을 걸면서 떠나려던 참이었다. 표를 끊는 일은 나중이라고 생각하고 차에 올라 자리를 잡으니, 안내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차비를 달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 몫으로 농민에게 받은 50원을 포함해서 차비를 주니, 그 중 50원짜리 지폐를 손가락으로 비벼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이거 위폐인데요. 못씁니다. 다른 걸로 주세요한다. 아차 싶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우리는 위폐를 판별할 능력도 방법도 없었다. 가끔 1백원 짜리 위조지폐가 유통되니 항상 확인하라고 들었고, 이 때문에 꼭 은행에 가서 꺼내 썼다. 그런 까닭인지 사고가 나는 경우는 없었다. 허나 상인이나 위에서 말한 농민과 같은 이에게 거스름돈을 받을 때는 사실, 대책이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의문스러운 것이 당시 석류를 판 농민은 그것이 위폐인줄 알고 우리에게 주었는지, 아니면 자신도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거스름돈을 주었는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다섯 시간 이상, 고속도로를 달려 옌안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자야할지부터 걱정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혁명수도의 본거지였다는 양쟈링에 숙소가 있는지 알아보니, 괜찮은 곳이 있다면서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시내를 벗어나서 어둑한 산길로 접어드는데, 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걸 떨쳐 내느라 기사에게 얼마나 남았나? 왜 이리 머냐?’ 등등으로 계속 말을 걸었다. 뒤에 알고 보니 옌안의 토굴을 모방해서 만든 토굴식 호텔이었다. 그곳의 말로 하면 요동빈관(窯洞儐館)이었다. 천장은 무지개형이었고, 방은 하나였다. 방 뒤쪽에 화장실과 욕실을 배치한 형태였다.


유장근2.jpg

유장근3.jpg

그림 2. 옌안의 양자링에 있는 요동형 빈관. 쥐가 들락거렸고, 닭울음 소리를 듣기는 하였지만, 특이한 체험이었다.


2007년은 중국공산당이 대장정 끝에 옌안에 자리 잡은 지 70년이 되는 해라서 이를 기념하는 이른바 홍색여행 열풍이 불고 있던 때였다. 이곳 빈관에도 그러한 분위기가 밀려왔다. 숙소에 묵은 관광객이 많았고, 그 이튿날 보게 된 공산당 지도자들의 숙소에도 적지 않은 홍색여행팀이 마당을 메우고 있었다.


옌안에는 공산당 본부가 자리 잡고 있던 양쟈링이나 자오위엔, 왕쟈핑 등에 옛 공공 시설물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국 공산당의 일부였던 연안파들이 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곳이었고, 저 유명한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삶과 죽음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양쟈링 일대에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주거와 사무실, 강당 등이 남아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특히 지도자들의 집이 모두 이곳의 주거 양식인 토굴(窯洞) 방식이었던 것이 이채로웠다. 구조는 위의 빈관과 달리 정면 3칸이었으며, 앞에만 출입문을 두었다. 천정은 반원형으로 처리하였는데, 옆에도 또 다른 방을 두어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었다. 일부 방에는 캉(炕)이라는 화북식 온돌을 두어 겨울 추위에 대비하였다잘 알려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주더 등의 지도자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살았던 것이다. 이곳에 가기 전에는 토굴집에서 살며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들었으나, 실제로 보니 토굴집 중에서도 비교적 호화로운 토굴이었다.


유장근4.jpg

크기변환_1유장근5.jpg

그림 3. 옌안의 양자링에 있는 공산당 수뇌부의 요동. 위의 3칸 요동은 마오쩌둥, 아래의 캉이 있는 요동은 주더의 것이다. 


옌안의 상징인 보탑산 아래 쪽에도 요동다운 요동이 있었다. 노백성의 집이었다. 영도자의 그것과는 영 달랐다. 내가 들렀을 때 오누이가 집밖의 마루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글씨도 잘 썼고, 문제도 잘 풀고 있었다. 누나는 6학년,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남동생은 4학년이었다. 모두 총명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집은 예전 그대로였고, 살림살이 역시 어려운 모습이 역력하였다.

 

유장근6.jpg

그림 4. 보탑산 아래의 산비탈에 자리한 노백성의 요동. 짧은 처마, 흙으로 쌓아올린 네모굴뚝, 낡은 문. 내부는 궁륭형 천장과 입구에 캉이 있는 구조였다. 그래도 오누이는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었다. 남동생은 흙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마침 그 옆의 요동에 노부부들이 살고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전기는 들어와 불을 밝힐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물은 언덕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내려가 길어 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집 역시 출입문 바로 안쪽에 캉을 두었고, 그 끝에 붙은 화덕의 불로 밥을 해먹는 구조였다. 캉이 침대 겸 아궁이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모든 세간이 캉 뒤편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게다가 오래 훈증된 탓에 내부 자체가 쩔어 있었다.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굴뚝은 처마 쪽에 겨우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붙어 있었으니, 공기가 제대로 소통되기 어려운 구조였다. 우연히 1940년대에 이곳 보탑산을 찍은 사진첩 속에서 탑 아래쪽에 죽 이어진 요동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찾아간 요동이 사진 속에 그대로 있었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산기슭에 사는 노백성들의 삶의 방식은 크게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혁명가들은 승리하여 떠났고, 그들을 도왔던 옌안의 노백성들은 예전처럼 살고 있었다. 이것이 역사이다. 현대의 옌안은 혁명의 성지라는 과거의 타이틀보다 이른바 '홍색여행'이라는 대대적인 이벤트 덕에 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이곳을 여행하고 난 뒤 제일 아쉬웠던 일은 시간에 쫓겨 조선혁명군 관련 유적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가본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행을 못하고 있다. 샨시성의 가을은 맛있는 감이 익고, 주먹보다 더 큰 석류가 자태를 뽐냈으며, 저 유명한 옌안의 왕대추도 맛을 더할 때이다. 황토고원은 건조하고 메마른 곳이지만, 하늘은 푸르렀고 공기 또한 따뜻했다. 중국인들의 속담에 산사람은 산에 의지해 살고, 강가에 사는 사람은 강에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옌안은 메마른 황토고원이지만, 그곳은 그곳대로 살아가는 관행들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던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17】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