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멍구자치구 서부, 간쑤성, 그리고 신장위구르자치구 일대의 하천들은 고산지대의 눈 녹은 물을 근원으로 한다. 건조지역을 흐르다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종점호수를 이루며 끝난다. 바다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내륙하천이라 불린다. 대표적으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타림강(塔里木河)과 간쑤성의 수러허(疏勒河), 간쑤성-네이멍구의 헤이허(黑河), 간쑤성의 스양허(石羊河)가 있다. 각각 로프노르(羅布泊), 쑤보노르(蘇泊淖爾)-가순노르(嘎順淖爾), 그리고 칭투호(靑土湖)를 종점호수로 한다.
로프노르는 1970년대 초반에 고갈되었다. 쑤보노르-가순노르는 1970년대 고갈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칭투호는 1950년대 말에 고갈되었다. 동시에 이들 종점호수에 물을 주입하는 하천의 길이도 짧아졌다. 고갈된 호수와 위축된 하천구간은 모래와 먼지가 노출되어 사막으로 변한다. 고갈된 호수와 하천 주변은 지하수위가 낮아져 나무와 풀도 말라죽는다. 오아시스가 사막이 된다.
그림 1. 로프노르 호수에 만들어진 칼륨염 생산 침전지(Google Earth)
지난 세기에 내륙하천 종점호수 고갈과 하도 위축은 현지 주민들과 일부 지리학자들 외에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저 사막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막 자체의 변화무쌍 정도로 취급되었다. 지난 세기말 강력한 모래먼지폭풍과 더불어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전면적인 대응책을 수립하지는 못했다. 최근 로프노르에는 칼륨염 생산 침전지가 만들어졌다. 종점호수의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서 로프노르는 절망이다. 반면 쑤보노르-가순노르 그리고 칭투호에 대해서는 고갈 저지와 수면 회복을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다음은 칭투호가 위치한 간쑤성 민친현(民親縣)에서 보고 들은 것이다.
그림 2. 민친현 시취(西渠) 마을의 면화 및 구기자 재배 농민
지하수 관정을 이용해 관개하고 있다. 2013년 7월, 필자.
치롄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스양허는 민친현을 통과하면서 칭투호라는 종점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서한 초에 이 호수는 저야택(瀦野澤)이라 불렸으며, 호수면적이 4,000㎢에 달했다. 한무제 시기 스양허의 상류에 서사군(西四郡) 중의 하나인 무위군(武威郡)이 설치되면서 시작된 농민의 이주는 하류로 흘러가는 물의 양을 감소시켰다. 수당 시기에 이르러 종점호수가 동·서 두 개의 호수로 나뉘었다. 내륙하천의 수량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호수면적은 1,300㎢로 줄어들었다. 대략 명청 시기부터 칭투호(靑土湖: 청토호)라 불렸으며, 최대 수역면적은 400㎢였다. 20세기 초 수역면적은 120㎢, 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수역면적은 70㎢였으나, 1959년 완전히 고갈되었다. 칭투호의 물이 마르자 바람이 일어 유동사구가 발현하였고, 모래먼지 폭풍(沙塵暴)이 빈번하게 일었다. 급기야 바단지린 사막과 텅거리 사막이 여기서 합쳐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현재 민친현의 총면적 16,016㎢ 중 6%가 오아시스, 94%가 사막 및 사막화 토지다.
1959년 칭투호의 완전고갈은 1958년에 건설된 훙야산 저수지(紅涯山水庫) 때문이다. 이 저수지는 “아시아 사막의 제1저수지”라는 자부심어린 수식어를 달고 있다. 저수지 건설을 둘러싸고 이 지역에서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수지 건설로 곡물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주장과 저수지 건설은 하류지역을 황폐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이 맞섰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이량위강(以糧爲綱)’ 구호 아래 후자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유리한 쪽은 주로 건설병단(建設兵團)과 같은 국영농장으로 이루어진 상류부 곡물 생산 농장들이었다.
스양허 하류에서 물이 말라버리자 하류부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주민들은 지하수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에 더하여 1980년대 초 개별농가에 토지사용권이 분배되면서, 물 사용은 급격히 늘어났다. 동시에 ‘북방대한(北方大旱)’ 또는 ‘육년대한(六年大旱)’이라 불리는 큰 가뭄이 계속되면서 물을 둘러싼 격한 싸움이 벌어졌다. “물을 내려 보내라!” “내려 보낼 물이 없다!”
지난 60년간 민친현에 만들어진 지하수 관정은 1만 공을 상회한다. 1950년대 지하수위는 평균 2미터였으나, 현재 18∼35미터 수준이다. 지하수의 과다사용은 토양염류화를 유발하였고, 지하수위는 계속 하강하였다. 국지적으로는 최대 320미터까지 관정을 파야만 했다. 전기와 석유 없는 오아시스 농업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농업의 채산성은 악화되었다. 주민들은 농업과 목축보다 간쑤성과 네이멍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지하수 관정을 굴착하는 민공(民工)으로서의 소득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관정의 증가는 지하수위의 하강을 불러왔고, 이는 다시 사막화로 이어졌다. 오아시스 농민이 오아시스를 사막으로 만드는 민공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과 같았다. 급기야 지하수 관정도 허가 없이 임의로 팔 수 없게 되었고, 채수량도 제한되었다. 전기와 석유 공급을 통제하면 지하수는 끌어 올릴 수 없다.
주민들은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른바 생태이민(生態移民)이다. 그러나 선뜻 받아주려는 지방정부는 없었다. 여기서 중앙정부의 빈곤현(貧困縣) 지원금이 의도치 않은 역할을 하게 된다. 이웃한 네이멍구 아라산맹(阿拉善盟) 어지나기(額濟納旗)에서 이주자를 받아주기로 한 것이다. 현재 어지나기에는 민친현에서 온 약 1천여 명의 생태이민자들이 있다. 이들은 민친현 정부와 어지나기 정부의 협상을 통해 왔다. 민친현은 물 부족과 사막화로 인하여, 인구를 이출시켜야 하는데, 어지나기는 한편으로 일정 이상의 인구수가 되어야 행정구역을 유지할 수 있고, 또한 빈곤자수가 일정비율 이상이 되어야 빈곤현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주를 허락한 것이다. 어지나기 역시 민친현과 유사한 사막화를 겪고 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이곳으로 사막화지역의 주민이 다시 온 것이다. 집과 농지를 받는 조건이다. 이를 받아들인 어지나기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빈곤현’이라는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쓴다. 어지나기뿐만 아니라 생태이민 접수지역 대부분의 상황이 이러하다.
민친 오아시스를 떠난 주민들은 칭투호에 물이 차야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물은 쉽게 내려 올 수 없었다. 이미 상류부에 많은 인구와 도시와 농장들의 이익이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하류에 남아 있는 주민들의 “물을 내려 보내라!”는 아우성은 중과부적이었다. 이때 강한 모래먼지 폭풍과 베이징 올림픽이 우군이 되었다. 중앙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 와중에서 스양허의 종점호수 칭투호의 재생이 민친 오아시스 생태 회복의 지표라는 것이 비로소 ‘공인’되었다. 빈곤과 칭투호 고갈과 모래먼지 폭풍과 국가적 이익의 연관성이 연구기관과 당정기구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림 3. 칭투호에 형성된 수면
2010년 전후로 수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013년 7월, 필자.
그 결과 2010년을 전후하여 칭투호의 약 3㎢ 면적에 물이 채워졌다. 미미한 면적이지만 빠른 생태회복이 나타났으며, 상징적 효과는 컸다. 그러나 물은 여전히 부족하다. 봄과 여름이 되면 민친현의 관리도 주민도 모두 신경이 날서 있다. 허가된 채수량에 대해 전기료와 석유 값을 할인해주는 방식으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하지만, 농민들의 가난은 잠재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목전에 둔 2007년 원자바오(溫家寶)는 민친 오아시스 일대를 시찰하고, “결코 민친이 제2의 로프노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決不能让民親成爲第二個羅布泊)”는 휘호를 남겼다. 이 말을 민친 오아시스 주민들의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물을 내려 보내라!”
그림 4. 홍야산 저수지에 설치된 원자바오의 휘호 입간판. 2013년 7월, 필자.
그림 5. 칭투호에 세워진 원자바오 휘호 조형물
“결코 민친이 제2의 로프노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決不能让民親成爲第二個羅布泊)”고 써 있다. 2013년 7월, 필자.
이강원 _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