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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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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류인가, 동남아 화교화인 사회 _ 김종호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화교화인을 배출한 대표적 지역으로는 복건성과 광동성이 꼽힌다. 그리고 이 두 지역내부의 지리적 구분이 각각의 출신지역이 되어 동남아시아 화교화인 공동체의 다양성을 형성하였다. 특히 이민이 대량으로 이루어진 근대시기에 와서는 그러한 구분이 더욱 선명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복건출신의 경우 복건성을 가로지르는 민강(閩江)을 기준으로 민남(閩南), 민북(閩北), 민동(閩東)등으로 나뉘고, 광동출신의 경우 성도인 광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Catonese), 배후의 매주(梅州)등으로 대표되는 객가(客家)지역, 그리고 동북방향의 조주(潮州)와 산두(汕頭)를 중심으로 형성된 조산(潮汕)지역으로 나뉜다. 복건출신 화교화인공동체 중에서는 민남의 세가 가장 크고, 민북과 민동의 경우 그리 활발히 해외로 진출한 지역은 아니었는지라 흔히 복건인을 일컫는 호키엔은 복건 전체를 가리키지만, 대부분 민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기에 해남도 출신의 화교화인 공동체를 추가하면, 역사적으로 동남아에 거주해온 화교화인의 출신지역은 호키엔(복건, Hokkien), 캔터니즈(광동, Catonese), 떼오추(조주, Teochew), 하카(객가, Hakka), 하이난(해남, Hainan)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물론 이는 운남성을 통해 대륙부 동남아로 건너온 소수의 화교화인들은 제외한 구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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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동남아 화교화인출신지역 지역구분 노란색은 호키엔, 주황색은 떼오추, 연보라색은 캔터니즈, 초록색은 하카를 가리킨다. 여기에 동남쪽의 하이난이 더해진다.



[그림-1]의 지도에서 보듯 호키엔이라 지칭되는 민남지역(천주, 장주, 하문 등으로 구성)과 떼오추라 지칭되는 조주지역은 행정구역상 성()은 다르지만 서로 인접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 두 지역은 왕조에 따라 행정상 같은 지역으로 분류되었다가 다른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등 꾸준히 상호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무려 진한(秦漢)대부터 당() 현종(玄宗)까지만 하더라도 이 두 지역은 같은 행정구역으로 분류되었다가 송(), (), ()대에 와서 다른 구역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그 영향으로 다른 출신지역들의 방언들은 서로 거의 다른 언어적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두 지역 사이의 방언은 같은 체계를 가진 것으로 분류된다. , 조주지역 방언의 경우 오히려 같은 성에 속해있는 광동어보다 민남지역의 방언인 민남어에 가까운 언어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객가를 지칭하는 하카의 경우 복건성과 광동성의 경계를 넘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동남아에 분포되어 있는 화교화인 공동체의 다양한 활동들을 현재 행정구역상의 분류만을 가지고 상상하려 할 경우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구분되는 이러한 동남아 화교화인 그룹들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낯선 동남아에 정착하여 왔다.


사실 지난 하이난 퀴진관련 연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등 도서(島嶼)부 동남아시아 화교화인 사회에서는 민남인, 즉 호키엔이 주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호키엔들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이난들처럼 호키엔 그룹과의 경쟁을 피하면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한 소수그룹도 있고, 대륙부 동남아시아와 도서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독자적이면서도 끈끈한 네트워크를 통해 성공한 기업가들을 다수 배출한 하카그룹도 있으며, 대륙부 동남아에서 명백히 주류를 이루면서 도서부에서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구축하여 호키엔들과 경쟁한 떼오추 그룹도 있다. 특히 떼오추 그룹의 경우 캔터니즈, 호키엔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의 화교화인 공동체로서 매년 세계 조학(潮學)대회가 조주에서 열리고 있으며, 경극(京劇)에 비견되는 조극(潮劇)을 연구하는 학문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번 연재에서는 도서부 동남아에서 주류세력인 호키엔들과 경쟁한 이들 그룹들에 대해 두 상인가문의 성공스토리를 사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 하카그룹의 호()씨 형제


지난 연재에서도 밝혔듯이 다양한 지역 색을 띠고 19세기 혹은 그 이전부터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로 건너 온 중국인들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지만, 그 외에 몇몇 시세에 밝은 이들은 동족인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해 거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돈 많은 화교 이미지의 시초가 바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과연 어떤 사업 아이템이 가장 유망했을까? 주로 육체노동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직업적 특성상 가장 필요했던 두 가지 물품이자 많은 중국 상인들에게 대박을 안겨주었던 그 물품은 바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아편과 현실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의약품이었다. 19세기 싱가포르의 중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편 중독자들이었다. 아편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퍼진 아편의 유통과 중독 만연현상은 영국 식민정부의 악랄함과 중국계 상인들의 무자비함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의약품의 경우 아무리 해외에 좋은 약품이 천지에 널려 있다고 해도 해외여행 갈 때 굳이 후시딘을 챙겨야 마음편한 현실의 우리처럼, 중국계 이주 노동자들에게도 역시 소위 ()’라고 분류되는 오랜 전통의 중의(中醫)약품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한 약품이었다. ‘라는 것은 각종 통증에 바르는 연고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중 미얀마 출신의 화교 상인형제인 오분호(Aw Boon Haw)와 오분파(Aw Boon Par)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객가(Hakka)출신의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져 온 ()’ 만드는 기술을 더욱 완벽히 발전시켜 대량생산 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그 제조 과정과 재료는 지금도 비밀이다). 1920년대 미얀마에서 이 를 판매하여 대박을 친 오(Aw)형제는 신성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싱가포르에 분점을 설치하는 수완을 부려 그 사업영역을 더욱 확장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홍콩 및 중국 내륙까지 유명해져 가히 상업제국이라 불릴 만큼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객가출신 거상의 탄생이었다. 이 상인 형제의 이름을 객가방언이 아닌 한자로 표기하면 바로 호문호(胡文虎), 호문표(胡文豹)형제가 된다(씨 형제). 요즘으로 치면 R&D에 투자하여 제품의 상용화에 성공한 셈인 이 의 상표명은 장남인 호문호의 이름의 마지막 글자, 를 차용해 타이거 밤 Tiger Balm’이라고 지었다. 지금까지도 싱가포르의 기념품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파스 및 전문 브랜드인 호랑이 연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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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싱가포르를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씩은 구입하는 타이거 밤






- 떼오추 출신 사(Seah, )씨 가문


싱가포르의 시티홀(City Hall), 선텍시티(Suntec City), 비치로드(Beach Road) 주변을 여행하다 보면 가끔 세아 스트리트(Seah st), 리앙세아 스트리트(Liang Seah st) 등의 이름을 가진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혹은 탄종파가(Tanjong Pagar)를 다니다가 펙 세아 스트리트(Pek Seah st)라는 이름의 거리를 봤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지명들은 다 싱가포르의 유명한 부자가문인 세아씨(Seah clan)의 성과 이름들을 가지고 명명한 것이다. 세아가문은 떼오추지역, 즉 조주지역 출신이다. 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싱가포르 세아가문의 개창자라고 할 만한 이는 세아 위친(Seah Eu Chin)이다. 한국어로 하면 사유진, 있을 유()에 나아갈 진()을 쓴다. 1805년생인데, 불과 열여덟 살이 되던 1823년에 싱가포르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거쳐 손꼽히는 거부가 된다.


그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업 아이템은 갬비어(Gambier)라는 식물이었다고 한다. 갬비어는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지에만 나는 식물로서 가죽의 광택 및 손질, 소위 무두질을 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재료이자, 약재로 쓰이기도 하던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세아 위친은 이 갬비어라는 식물을 재배하는 대농장(플랜테이션Plantation)을 운영하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의 대농장이 얼마나 넓었냐면 지금의 리버 밸리 로드(River Valley Rd)에서 시작, 부킷 티마 로드(Bukit Timah Rd)를 거쳐 톰슨 로드(Tomson Rd)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의 클락키(Clark Quay), 솜머셋(Somerset), 오차드(Orchard), 뉴튼(Newton), 노비나(Novena) 등등 여행객들에게는 친숙한 싱가포르 중심가 지명들이 다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면 감이 잡힐 것이다. 그렇게 쌓은 자본을 바탕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치부하게 되는데, 그의 금수저아들들, 세아 리앙세아(Seah Liang Seah)와 세아 펙 세아(Seah Pek Seah) 역시 무역업에 뛰어들어 한 손을 보탰다고 한다. 이 삼부자의 이름들이 모두 현재 싱가포르의 지명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재산을 축적하여 싱가포르의 유력 가문으로 도약한 세아(Seah)가문은 돈 좀 있는 집안은 누구나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자선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의안공사(義安公司)라는 이름의 이 재단은 가문의 뿌리인 조주, 즉 떼오추 지역의 수대(隨代)시기 지명인 의안에서 그 명칭을 따 온 것이다. 자선재단인 만큼, 동향 출신의 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장학금, 생활비 보조 등을 해주기도 하면서 떼오추의 지역문화 및 정체성을 잃지 말자는 취지로 1845년에 설립되었다. 이 의안공사의 떼오추식 발음이 바로 니안 콩쓰(NgeeAn Kongsi)이다. 싱가포르 내에 이 니안(NgeeAn)’ 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그 무엇이든 간에 이 재단 소유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대학, 중의학 센터, 문화센터 등은 물론이고, 오차드 로드의 명물이자, 만리장성을 본 따 디자인하였다는 니안시티(NgeeAn City, 흔히 다카시마야Takashimaya빌딩으로 알려진) 역시 이 재단, 즉 세아가문의 소유다. 니안재단의 경영사업 본부 사무실이 이 니안시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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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만리장성을 본 따 설계되었다는 니안시티는 싱가포르 최고의 명품거리인 오차드 로드의 중심에 위치한 쇼핑몰이다.

 

이외에도 도서부 동남아시아에는 주류인 호키엔뿐 아니라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진 화교화인 공동체들이 각자 나름의 영역을 가지고 경쟁과 협력을 거치면서 현재의 화교화인 사회를 이루어 왔다. 역사지리적 출신배경을 토대로 구분되는 이들 화교화인 공동체들은 일반적으로 동남아 화교화인사라는 범주속에서 전체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게 되면 놓치게 되는 부분도 많다. 좀 더 자세히 개별적으로 들여다보게 되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양상들을 캐치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7】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필자 링크 제공)

[그림-1] 동남아 화교화인 출신지역 지역구분

http://enacademic.com/dic.nsf/enwiki/11531544

 

[그림-2] 타이거 밤

https://www.pinterest.co.kr/pin/240590805072537993/

 

[그림-3] 니안시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akashimaya_Shopping_Centre,_Singapore_(823327357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