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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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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 소개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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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조선 화교의 성당건축 시공 활동(1880년대1930년대):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51, 한국교회사연구소, 4383.

 

서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북 전주 전동성당, 대구의 계산성당·성모당·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화산성당), 경북 칠곡 가실성당,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 이들 성당과 가톨릭 관련 건축물은 한국의 중요한 근대유산으로 가톨릭 신자는 물론 일반인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 가톨릭관련 건축물은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이 참가하여 시공한 공통점이 있다.

 

<> 필자가 확인한 화교 건축회사 및 화교 직공 시공의 가톨릭 관련 건축물 목록

소재지 및 건축명

시공연도

현존여부

설계자

시공자

서울 용산신학교

1891-1892·1911(증축)

현존

코스트

왕베드로

서울 약현성당

1891-1892

현존

코스트

진베드로?

서울 명동성당

1892-1898

현존

코스트·프와넬

진베드로

인천 수녀원

1893-1894

소실

코스트

화교직공참가

인천 답동성당

1894-1897·1937

현존

코스트·시잘레

화교직공참가

서울 용산신학교성당

1899-1902

현존(원효로성당)

-

화교직공참가

서울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1897-1900

멸실

-

진베드로

대구 계산성당

1901-1903·1908

현존

로베르

진베드로·강의관

전주 전동성당

1908-1914

현존

프와넬

강의관?

대구 아담스관

1908

현존

-

화교직공참가

횡성 풍수원성당

1909-1910

현존

시잘레

진베드로

서울 성베네딕도수도원 본관

1911

멸실

-

화교직공참가

대구대목구 주교관

1912-1913

소실

-

강의관

원주 원동성당

1913

소실

-

진베드로?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성당

1914-1915·1919

현존

프와넬

강의관

대구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코미넷관

1914-1915

현존

로베르

강의관

대구대목구 명도회관

1914

소실

-

강의관

원주 용소막성당

1915

현존

시잘레

진베드로?

익산나바위성당

1916

현존

베르모렐

화교직공참가

대구 성모당

1918

현존

로베르

강의관

칠곡 가실성당

1920-1924

현존

투르네

강의관·모문금

아산 공세리성당

1920-1922

현존

드비즈

화교직공참가

대구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성당

1927

현존

-

강의관·모문금

칠곡 왜관성당

1928

현존

투르네

화교직공참가

당진 합동성당

1928-1929

현존

페랑

화교직공참가

대구화교협회

1929

현존

-

강의관·모문금

경산 하양성당

1930-1931

현존

-

강의관·모문금

김천 황금성당

1934

현존

-

모문금

광주 북동성당

1937-1938

현존

가요셉

가요셉

대구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수련소

1937-?

-

-

모문금

 

본고는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이 이러한 종교건축 시공에 참가한 배경과 원인을 분석한 것이다. 활용한 사료는 뮈텔주교 일기(1890-1933),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각 성당의 기념지 그리고 각 성당의 현지 조사를 통해 입수한 각종 정보 등이다

 

필자는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가톨릭 신자인 왕베드로와 진베드로가 초기 서울의 가톨릭 건축의 시공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으며, 특히 진베드로는 명동성당뿐 아니라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그리고 대구의 계산성당 건축시공에 감독으로 참가했다. 화교 벽돌조적공은 벽돌 굽기와 조적 기술을 보유하여 시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인 벽돌조적공이 가톨릭 관련 건축물 시공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화교와 같이 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대목구의 각종 가톨릭 건축물을 시공한 것은 대구지역의 건축청부회사인 쌍흥호로 청부업주인 강의관과 감독 모문금이 1910년대부터 대구의 주요한 종교건축을 거의 시공했다. 강의관은 강프란치스코가 세례명인 가톨릭 신자로 산동성 황현 출신이었다. 그와 같은 동향 출신인 모문금은 경성의 쌍흥호 건축청부회사에서 설계사로 활동한 경력도 있어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지역의 대부분의 벽돌조적의 종교건축 시공을 담당했다.

 

이와 같은 화교 건축청부회사는 193010월 현재 46개소였으며, 이 가운데 경성에 13개소, 인천에 5개소가 있어 가장 많았다. 벽돌조적공은 119명으로 조선인, 일본인보다 더 많았다. 화교 건축청부회사가 종교건축을 비롯한 공사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한 데는 다음과 같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화교 청부업주와 직공 간은 주종의 관계로 가족적인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 둘째, 화교 청부업자와 직공의 작업 태도가 매우 성실하고 충실하다는 점. 셋째, 직공은 공사 감독자의 지시에 순종하고 공사를 빨리 마무리 한다는 점. 넷째, 화교 직공의 임금이 조선인과 일본인에 비해 저렴하여 공사 수주 가격이 싸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번 연구에 의해 화교 벽돌조적직공과 같은 화교 숙련 기술자가 종교건축물의 시공에 참가하여 크게 활동한 것을 밝혀냈는데, 이는 쿨리와 같은 단순 육체노동자 중심의 기존의 화공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