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 혼인법의 근간이 되는 것은 1950년에 제정, 공포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 혼인법이다. 이 혼인법은 남녀평등의 보편이념에 기초하여 혼인 당사자의 혼인과 이혼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이는 많은 여성들이 이혼을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붙여진 것이 일명 ‘이혼법’이라는 별칭이다. 전통시기 여성의 이혼제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을 감안하면 일정한 행정절차를 거쳐 이혼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여성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입법이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전통시기에 여성의 이혼이 어려웠음을 짐작케 한다.
중국의 전통시대는 남존여비의 사회였고 여성의 지위가 무척 낮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일 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홍등’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영화 홍등은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가족구조 속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겪게 되는 갈등과 비극을 실감나게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영화 속 남편이 부인(첩)을 여럿 두고 이들을 한낮 노리개로 취급하면서도 셋째부인이 외간 남자와 부정을 저질러 발각되자 자살을 빙자해 살인하는 모습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 바로 루쉰(魯迅)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을 잡아먹은 예교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관련 문헌을 뒤적이다 보면 영화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혼의 경우만 보더라도 중국 전통시기 이혼을 의미하는 용어는 바로 출처(出妻: 아내 내쫒기) 혹은 기처(棄妻: 아내 버리기)였으니 말이다.
‘이혼(離婚)’이 ‘혼인관계를 청산한다’라는 의미라면 전통시대에도 이혼제도는 존재했다. ‘이혼’이라는 말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리(離)’, ‘리지(離之)’, ‘리이(離異)’라는 말로 혼인의 무효 혹은 해소를 가리켰다. 그러나 전통시기의 이러한 용어들과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이혼’을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은 기처(棄妻), 출처(出妻), 축처(逐妻), 유처(遺妻), 휴처(休妻), 출유(黜遺), 휴기(休棄) 등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한대 법률에서 규정된 이후 계속 법률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이 모두 아내를 ‘버림’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혼의 주도권은 남편측에 있으며 아내는 이혼의 권리가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전통시기의 이혼장 '휴서(休書)'
고대의 예(禮)를 기록한 『예기‧혼의(禮記‧昏義)』에는 “혼례는 예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다. 즉 혼인은 당사자들의 개인행위를 넘어 중요한 사회행위이며, 혼인제도는 사회제도의 근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부는 애정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의(義)로 맺어진 관계였다. 종법제 사회에서 혼인의 주요한 목적은 “위로 종묘를 섬기고 아래로 후세를 잇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주혼권은 혼인 당사자가 아닌 가장(家長)에게 있었다. 혼인 당사자가 자유혼을 말할 수 없고 여자가 이혼의 권리가 없는 사회에서, 이혼제도란 바로 ‘아내를 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기 때문에 땅이 하늘의 ‘의’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호통‧가취(白虎通‧嫁娶)』에는 “남편이 악행이 있다 해도 아내는 (그를) 버릴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말은 없다. 오히려 아내가 자기 의지대로 남편을 떠나게 되면 징벌을 받았다. 『당률‧호혼(唐律‧戶婚)』에는 “처첩이 마음대로 (남편을) 떠나버리는 자는 징역 2년에 처하고 이로 인해 개가하는 자는 2등을 더한다”고 되어 있다. 명청시기의 율례 규정에도 “만일 아내가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는 자는 곤장 1백대에 처하고 남편 집에서 (아내를) 팔아버린다. 도망하여 개가하는 자는 교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아무리 ‘기처’가 합법적이라고 하더라도 합당한 명분은 필요했다. 그 근거가 바로 7출(七出)이었다. 7출은 아내를 버릴 수 있는 7가지 법적 조건이다. 7출은 원래 예제상의 규범인데 『대대례(大戴禮)』에1) 처음 등장한다. 즉 부모에 순종하지 않거나, 아들이 없거나, 음란하거나, 질투하거나, 불치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절도를 했을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부모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도덕에 위배되는 것이고, 아들이 없는 것은 대를 끊는 것이고, 음란한 것은 종족을 문란케 하는 것이고, 질투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깨는 것이고, 불치병이 있는 것은 제사를 지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7출의 조건은 법적으로는 정당한 이유였지만 실제로 이를 적용할 때는 그 기준이나 해석에 모호한 점이 많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7출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아내를 버릴 수 없는 경우(三不去)가 셋 있었다.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룬 경우, 처음의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하게 된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조항은 당대에 와서 법률로 규정되었다.
이상의 ‘기처’나 ‘출처’는 중국 전통시기의 가장 일반적인 이혼의 형식이었다. ‘기처’가 일방적으로 남편측이 제기하는 것이라면 ‘협의에 의한 기처’도 존재했다. 문헌에서는 ‘화리(和離)’로 표현되고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합의이혼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시대의 ‘리지(離之)’가 현대의 ‘이혼’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것처럼, ‘화리’와 ‘합의이혼’을 동등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화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7출의 조건하에서 남편측이 기처를 제기하면 이에 대해 아내측 가정이 수긍하고 법적인 이혼에 동의한다는 정도의 의미였다. 이는 아내를 공개적으로 쫓아내지 않고 조용히 처리한다는 의미였을 뿐, 현재와 같은 쌍방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와 합의에 의한 이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통시기의 또 하나의 이혼형식은 ‘의절(義絶)’이었다. 상술했듯이 부부의 결합은 ‘의’로 맺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에 부부간에 어떤 심각한 사정이 발생했을 때 이미 의가 단절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경우 법률적으로 혼인관계를 해제해야만 하기 때문에 ‘의절’은 법적인 강제 이혼에 해당된다. 즉 이혼을 하지 않으면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전통시대에는 민사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관련 규정은 형률로 규정되었다. 의절에 대한 『당률‧호혼』의 규정에는 “모든 의절을 범한 자는 리지(離之)할 수 있고 위반자는 징역 1년에 처한다”고 하고 있다. 명청률의 조문에도 “만일 의절을 범하고도 떠나지 않는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절은 언제 하게 되었던 것일까? 의절의 조건은 당률에서 “남편이 아내의 조부모, 부모를 구타하거나 아내의 외조부모, 백숙부모, 형제, 고모, 자매를 살해했을 때, 아내가 남편의 조부모, 부모를 구타하거나 남편의 외조부모, 숙백부모, 형제, 고모, 자매를 살상했을 때, 아내가 남편의 시마(緦麻) 이상의 친족과 상간하거나 남편이 아내의 모친과 상간했을 때, 아내가 남편을 해하려고 했을 때”이다. 이는 모두 친속간의 상해, 살인, 상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의절 조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시 남편측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아내가 남편을 해하려고 하는 것은 의절에 속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해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한다는 조항은 아예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법은 명청시기까지 이어지다가 근대에 와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30년 중화민국 정부에 의한 민법 친속편의 제정은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같은 시기 공산당의 각 혁명근거지에서 제정된 혼인법도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들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제정한 것이 1950년의 혼인법이다. 여전히 전통적인 요소가 산재해 있던 당시에 혼인과 이혼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제창했으니 그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을까. 가정에 속박되어 있던 여성을 해방시켜 국가의 일원으로, 산업역군으로 탈바꿈하게 했으니 말이다. 반면 남편의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을 수도 있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법이었으리라.
이 혼인법은 1981년에 공포된 새혼인법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 이후 2001년과 2011년에 각각 수정 입법 형식으로 개정되었지만 그 기본 골격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번 수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 여성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현재의 혼인제도가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최근 독신여성의 증가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올해 3월에 발표된 개정 혼인법의 이혼시 재산분배 조항은 여성에게 더욱 불리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독신여성의 증가로 인해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독신남성의 증가율이 상승하여 향후 독신남성이 30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할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여성들의 혼인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듯하다. 언젠가 여성이 하늘 아래의 절반, 인류의 일부로서 그냥 특별히 언급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될 때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관습과 중국문화 9】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예기(禮記)는 오경(五經)의 하나로, 공자와 그 제자들이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문물제도와 의례, 예절 등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한나라 때 예학(禮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등장했는데 그중 대덕(戴德)과 대성(戴聖)이 대표적이다. 대덕이 전한 기(記) 85편을 대대례(大戴禮)라 부르고, 대성이 전한 예(禮) 49편을 소대례(小戴禮), 즉 예기라 부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baike.com/wiki/%E5%87%BA%E5%A6%BB
참고문헌
金池洙, 『中國의 婚姻法과 繼承法』,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3.
王躍生, 『淸代中期婚姻衝突透析』,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3.
陶毅, 明欣, 『中國婚姻家庭制度史』, 東方出版社, 1994.
史鳳儀, 『中國古代婚姻與家庭』, 湖北人民出版社,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