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미국은 이미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제품에 대한 추가적인 관세 부과를 확정한 데 더해 2000억 달러 규모의 목록을 재차 발표하면서 판돈을 무한정 늘리고 있다. 합해서 2500억 달러면 베트남의 1년 국내총생산(GDP)을 초과하는 규모이다. 중국은 이에 상응해 딱 500억 달러에 맞춘 대응안을 마련했지만 추가적인 2000억 달러에 대해서는 반격을 예고했을 뿐 아직 구체적인 조치를 내놓지는 않고 있다. 일단 지금까지는 7월 25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무역갈등 완화에 합의함으로써 중국과 연합하지는 않았지만 독자적으로 미국과 대립하고 있던 유럽연합이 한발 더 물러서게 되어 중국이 갈수록 고립되고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다. 이 와중에 지난 7월 5일 중국 상무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대한 '무역 따돌림주의(貿易霸凌主義)'라는 비판이 등장했다. 외교부를 비롯한 다른 부처는 물론, 관방 언론들도 지속적으로 이를 애용하면서 '무역 따돌림주의'는 중국 정부의 공식용어가 되었다.
'따돌림', 중국어로 '바링(霸凌)'이라는 공식용어는 어색하다. 우선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의 입말로 하면 '괴롭힘', '왕따'라는 의미이다. '바링'은 영어 단어 'bully'에서 음차하여 뜻에 걸맞은 한자를 붙인 것으로 정통적인 중국어 사전에는 기재되어 있지도 않다. 중국이 북한만큼이나 외래어 사용을 기피해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더구나 '바링'은 대만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단어이다. 이런 만큼 '바링'이라는 단어에는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거나 최소한 중국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과정이나 정확한 의도를 확인할 수는 없다. 몇몇 중국학자들에게 물어봐도 의견이 분분하다.
'바링'이 어떤 단어를 대체한 것인지는 분명하다. 중국 정부와 언론들은 얼마 전까지도 미국의 관세 부과를 비판하면서 '패권(霸權)'과 '패권주의(霸權主義)'라는 유서 깊은 단어를 사용했었다. 영어의 'hegemony(헤게모니)'에 대응하는 단어이다. '바링'의 공식적인 영문 번역에서도 'trade bullying(무역 괴롭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번역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의미를 바꾼 것이다. 사실 '바링'은 근엄하고 진지한 국제정치학의 용어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패권과 패권주의는 마오쩌둥의 '제3세계' 개념을 통해 더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냉전 시기 마오쩌둥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진영의 초강대국을 제1세계로, 중국을 비롯한 약소국들을 제3세계로 규정했다. 이들을 제외한 일본, 유럽 등이 제2세계였다. 이러한 분류를 통해 패권적 야욕을 가진 제1세계인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제3세계의 대표이자 보호자로 내세웠다. 따라서 소련이 사라지고 중국이 미국과 맞먹는 국가가 되어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미국을 패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중국도 이제 자신을 제3세계로 분류하는 것이 어색할 것이다. 미국이 패권을 추구한다고 비판하지 않고 중국을 괴롭히고 따돌린다고 항의하는 것은 오히려 중국의 높아진 위상이 반영된 측면이 있다는 말이다. 왕따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왕따는 동급생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다. 미국과 중국이 어른과 아이처럼 어떻게 해도 상대가 안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기껏해야 미국과 중국의 차이는 이제 미국이 중국을 왕따시킬 정도밖에 안 된다. 군사안보 영역에서는 여전히 패권이라는 용어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힘의 차이의 축소가 아직은 무역과 경제에 국한된 것일 수는 있다.
정반대로 '바링'은 중국이 자신의 약함을 자각한 표현이거나 엄살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영문 번역어 'bullying'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힌다는 의미이다. 작년 19차 당대회에서 '신시대(新時代)'가 선언된 이후에 중국은 자신의 강대함을 주저 없이 드러내왔다. CCTV가 올해 3월에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무려 '대단하다, 우리나라(厲害了, 我的國)'였다. 국가역량 분석에서 최고 권위자인 후안강(胡鞍鋼) 칭화대학 교수는 작년 초에 논문을 발표해 중국이 경제, 과학기술 등 많은 부문에서 미국을 이미 앞섰고 국방, 국제적 영향력 등은 근소한 차이로 뒤지지만 곧 따라잡게 된다고 분석했다. 종합적인 국력으로 보면 중국이 미국을 이미 사실상 추월했고 미국은 쇠퇴 중이고 중국은 부상 중이니 두 나라의 미래는 자명하다. '중국의 전면적인 미국 추월론(中國全面超過美國論)'으로 불리며 이 주장은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후안강의 주장은 최근 시진핑 띄우기에 열중하고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촉구하는 중국 당국의 입장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링'이라는 단어는 중국이 다시 차분하게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고 전략을 가다듬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분명한 적을 규정하는 패권주의자라는 비난과 달리 중국을 따돌린다는 비난은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자신이 만들고 유지해 온 자유무역에 기반한 국제경제체제와 어울리지 않게 특정 국가를 따돌리고 약자를 괴롭히는 미국의 위선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를 꾸짖으면서 중국을 진정한 국제체제의 수호자이자 도덕적인 약자로 부각시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에서 드러나듯이 누구 힘이 센지 끝까지 가보자는 미국에 맞서 누가 옳고 그른지 따져 보자는 쪽으로 프레임을 이동시키는 효과도 있다.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한 중국학자에 따르면, 중미 무역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다큐멘터리 '대단하다, 우리나라'의 방영이 제한되는 등 중국의 강대함을 드러내는 주장에 제동이 걸리고 미국의 대중국 제재의 핵심인 '중국제조 2025(中國製造2025)'에 대한 언급도 자제되고 있다고 한다. 너무 가열된 인민의 '중국몽(中國夢)'과 '강국몽(強國夢)'에 대한 환상을 미리 식혀 혹시 모를 무역전쟁의 패배가 가져올 후환을 미리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겠으나 자신과 미국의 객관적인 전력 차이에 대한 인식이 반영됐을 수도 있다.
새로운 단어는 새로운 인식을 반영한다. '바링'이 중국의 강함을 드러낸 것인지, 약함을 드러낸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두 측면이 모두 포함되었다면 중국은 여전히 미국보다 약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져볼 만큼은 되었고 미국이 주도한 국제체제의 파괴자가 아니라 미국이 배신하고 있는 국제체제의 수호자로서 나서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게 맞다면 중국의 섬세한 자기 인식이 부럽고 무섭다.
조형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아주경제』 2018년 7월 13일자 동명의 칼럼을 수정한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후안강의 주장은 다음을 참조.
胡鞍鋼·高宇寧·鄭雲峰·王洪川, "大國興衰與中國機遇: 國家綜合國力評估." 『經濟導刊』 2017年3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