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의 시대가 되면서 인류역사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욕망의 긍정과 제도화일 것이다.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욕망은 드러내고, 과시해야할 그 무엇이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조절하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격려하고 조장하는 문화가 사회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 심지어 욕망은 그것의 주어가 무엇이든지 간에 사회적 발전의 원동력으로까지 해석되었다. 이러한 욕망의 긍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위선의 가면 뒤에 숨은 욕망을 폭로하고, 마땅히 긍정되어야 할 가치들의 억압을 해체시킴으로써 인류사회의 진보에 기여한 측면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아마도 근대성의 핵심요소는 그러한 욕망의 긍정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찰 없는 욕망의 질주가 만들어낸 사회적 결과가 아름다울 수는 없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욕망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예컨대 회남자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날카로운 연장에 손대지 못하게 하듯이 야망을 가진 사람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손에 넣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사회에서 욕망은, 칭찬되기 보다는 억제되거나 조절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욕망은 이성적이고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훼손시킬 우려가 크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 지도자나 사상가 철학자들은 욕망의 조절 혹은 욕망의 극복을 통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매우 중요한 인간적 삶의 가치로 생각해 왔다.
전환기의 사상가로 근대 시장사회의 이론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아담 스미스 같은 인물조차 시장이 성숙해지면 ‘보이지 않는 손’ 즉 ‘인간의 윤리의식’이 인간의 탐욕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순수한’ 희망이 탐욕에 물든 사람들에 의해서 전혀 그의 의도와는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었던 것은 욕망의 조절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욕망의 조절이나 절제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자기 위로의 수사학쯤으로 치부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긍정은 일종의 ‘희망 고문’의 형태로 개인주의의 확산과 함께 일반화되어갔다. 그래서 ‘사회구조적 문제는 개인 윤리적 차원으로 환원되었다’. 더구나 유가적 전통은 이러한 논리에 적합한 근거를 마려해 주었다.
중국의 경우 농민들이 공산당의 토지개혁에 대해 열광했던 것은 자유롭게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아마도 공산주의의 실패는 욕망을 이용하되 욕망을 부정해야하는 궁극적 유토피아 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택동이 두려워했던 것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등이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통제하는 것이 이념적으로 적절한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중국지도부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욕망은, 사실상 공산당의 통제 하에 허용된 범위 안에 있을 때 올바른 것으로 정의되었다. 사전에서는 개인주의를 “부르주아적 세계관의 진수, 타인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동”으로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우리”라는 일상적 표현은 감소하고 “나”라는 자신을 내세우는 표현이 욕망의 긍정과 함께 일반화되었다.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40년 동안 억제되어왔던 세속적 욕망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래서 어떤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당대 중국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야망”이라는 중심어를 내세웠다.
현실 속에서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추구가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이유는, 무한대의 욕망추구가 실제로 가능한 사회적 집단이 매우 제한되어있다는 현실 그리고 욕망이 경쟁하는 체제의 공정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욕망의 추구 대상이 자기가 사는 삶의 공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전통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욕망할 수 있는 범주는 지극히 좁은 영역에 제한되어 있었고, 사회적 신분에 따라 욕망할 수 있는 대상도 제한되어 있었다.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은 사회/경제/정치적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확장되었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면 적어도 경쟁체제에서라도 신분/계급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없어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상은 문서에나 존재하는 것이었고, 불공정한 욕망의 경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간격을 더욱 벌려 놓게 만들었다.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이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 정도라면, 사회적 강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사실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우월적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잉욕망은 다양한 담론으로 위장되었으며 조절되지 않은, 성찰되지 못한 욕망은 부패를 낳게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현대 중국의 경우 부패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상적 현상이 되었다. 이는, 21세기 초 중국의 한 학자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각 성의 교통관련 행정최고책임자의 거의 절반이 감옥에 갔으며 부패비용이 중국 GDP의 3%를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부패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확산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은 정부감찰기능을 통한 대응과 <혁명도덕> 등의 관제윤리교육 등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핵심지도부 모두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공산당과 정부는 신뢰성의 위기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중국 공산당이 부패문제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 정치국원을 재판정에 세우고, 번영하는 중국의 위상을 국방력과시를 통해 선전하고, 당국(黨國) 일체의 애국주의교육/선전을 통해 그러한 부패의 확산추세를 막을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부패가 확산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부패 체계의 관행화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사적 욕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패의 체계가 혁신되지 않는 한 이미 ‘관행화된 부패’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부패문제는 심각하다. 특히 엘리트 집단의 부패 경향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온 공직자들의 청문회 자료들은 그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법, 제도와 사회적 윤리를 초월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개인적 욕망을 법으로 감추고, 관행으로 위장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더럽고 치사한’ 엘리트들의 모습은,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부패의 연쇄를 확산시켜 나가는 촉매제(그들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거라는 점에서)가 될 거라는 점에서 사회적 위기를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엘리트 집단의 행태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다. 성찰되지 않은 권력가진 자들의 욕망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권력욕으로 헌정질서의 유린을 반복해온 자들이 법질서를 말하고, 위법한 기업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은 자가 뻔뻔하게 공직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고, 대부분의 이익을 중소기업의 고통스런 희생에 기대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고, 자신의 잘못이 국가기관에 의해 폭로되자 이제는 스스로가 심사 혹은 수사하겠다고 나서는 파렴치함을 스스로 성찰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한국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맹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 가운데 하나로 ‘수치를 알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을 들었다. 우리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3】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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