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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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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소식은 만금과도 같고-동남아 화교송금과 수객 _ 김종호

당대(唐代) 최고의 시인이자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두보(杜甫)가 안사의 난을 겪으며 지은 시, “춘망(春望)”은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그 가운데 봉화가 3개월을 이어지니 가족의 소식은 만금과도 같다(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는 구절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가족의 소식이 귀해진 당대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읊은 명문으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실제 두보는 안사의 난 시기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다가 장안에서 안녹산의 군대에 의해 억류되었고, 그 와중에 춘망을 지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천년도 넘게 지난 19세기, 20세기 복건(福建)의 중국인들 역시 종종 그들의 가족들이 동남아에서 열심히 벌어서 보내오는 돈과 편지를 ‘(동남아에서 오는) 가족의 소식은 만금과도 같다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전란으로 쉬이 접하기 어려웠던 가족의 소식을 만금에 비유했던 두보와는 달리, 동남아 화교의 가족들(교권僑眷)은 그들의 가장이 보내오는 돈(과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소식)을 직접적으로 가리켰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일찍부터 외부와의 교역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복건인들 특유의 묘한 실용성을 엿볼 수 있어 더욱 그렇다. 물론 그들이 보내는 송금이 실제 만금에 이르렀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다양한 측면에서 그만한 가치를 했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편전쟁이 영국과 청() 제국의 무역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대륙으로부터 차, 비단, 도자기 등의 수입을 요구한 영국과 은을 통한 결제만을 원한 청 제국 사이의 무역은 필연적으로 영국의 막대한 은 유출로 이어졌고, 광동무역체제하에 광주(廣州)의 제한된 구역에서 막대한 세금을 지불해가며 이루어지는 무역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자만을 불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영국은 어떻게 해서든 차를 직접 재배하려 노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인도와 동남아에서 재배한 아편을 광주를 통해 대륙으로 대량유출하기에 이른다.

 

아편의 유입으로 영국은 무역불균형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아편전쟁 직전이 되면 오히려 무역흑자를 기록, 청 제국으로부터 은이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청 조정은 은 유출과 아편중독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심각히 여겨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주에 파견하였고,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아는 아편전쟁의 발발과 남경조약의 체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후 뒤집힌 대()서구 무역적자는 청조를 끊임없이 괴롭히는데, 문제는 은 유출을 메울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역을 애걸하던 과거의 오랑캐가 아닌, 이미 대륙의 이권을 차지하고 재정을 갉아먹으려 혈안인 침략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범죄자 취급해왔던 해외이민자들의 송금이 청 조정을 재정적으로 괴롭히던 은 유출을 상당부분 메워주고 있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로 퍼져 노동력을 대가로 돈을 벌게 된 복건인들은 대부분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성인남성들이었기에, 그들이 번 돈을 대부분 교향(僑鄕)의 가족들에게 송금하였다. 그들이 받는 임금은 모두 은화 혹은 외화였으므로 국내로 송금되면 그것이 바로 은화의 유입 및 외환의 유입에 다름 아니었다. 복건인들을 비롯한 노동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수백만에 달하게 되자 이들이 정기적으로 보내는 송금은 자연적으로 방대한 양의 은화 및 외환의 유입인 셈이 되었다. 이 유입은 복건성 무역적자의 경우 은 유출을 메우고도 남았고, 청 제국 전체 무역적자의 경우 매년 20-30%는 꾸준히 메워주는 기특한 역할을 하였다. 지역 경제의 경우 무역적자의 해결뿐 아니라 지역 현금소비의 원천, 교향가정경제의 기둥, 세금의 원천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복건 남부지역에 횡행하던 토비(土匪)들이 현금 및 어음을 대량 휴대한 송금배달부, 즉 신차(信差, 혹은 批脚)는 건드리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을까. 당시 토비들은 신차를 발견하면 따로 불러서 배달리스트만 확인한 뒤에 송금이 배달된 이후, 각 가정을 방문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듯, 중앙과 지역 경제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해외거주 중국인들의 송금을 복건남부, 즉 민남(閩南)지역의 방언으로 교비(僑批)라고 지칭하였다. 교는 해외 거주민을 뜻하는 단어, 비는 송금과 편지가 결합된 형태의 송금방식을 말한다. 이는 대부분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것이었기에 안부편지를 함께 동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소식이 만금과도 같다는 구절의 의미가 복건인들에게는 가족의 소식은 돈과 함께 온다로 해석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초기에는 동향의 친구, 객두(客頭), 무역상인 수객(水客) 등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대 이후 노동이민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개인 간의 혈연, 지연에 기반 한 송금청탁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전달량의 한계가 발생하였고, 또 다수 노동자들의 송금을 처리하면서 발생하는 커미션을 노린 상인들의 이익추구 본성이 발휘되면서 전문 송금처리기관인 교비국(僑批局)이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송금의 의뢰 및 청탁은 대부분 혈연, 지연 등 동향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당연했다. 사실 중국 국내의 송금은 명청대를 거치면서 휘주상인과 함께 양대 상인집단을 형성하였던 산서상인들이 설립한 산서표호(山西票號)를 통해 활성화된 측면이 존재했지만, 국가간 경계를 넘는 국제송금이라는 측면에서 교비와 교비국의 탄생 역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송금, 즉 교비를 담당한 이들을 보통 수객(水客)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복건 지역사회와 해외 중국인 커뮤니티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원래 수객이란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동부 지역을 오가면서 무역을 행하는 소무역상을 지칭하지만, 사실 그들은 객두의 역할을 겸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남아에서 구입한 진귀한 물품들을 복건성 하문(廈門)으로 건너가 팔아버린 뒤에, 고향 마을을 돌면서 신객(新客)들을 모집하여 하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하문에서 차와 도자기 등 복건성의 물품들과 함께 신객들을 인솔하여 동남아로 건너가는 식이다. 그 수객이 만일 몇몇 해외 중국인들에게 송금을 의뢰 받았다면, 그 송금들을 모아 무역의 종자돈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수객의 이득은 무역으로 발생한 차익과 송금 수수료였다. 그가 객두든 수객이든 동남아시아와 중국 대륙을 자주 오가는 직업의 특성상 교비의 전달에 매우 특화되어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하여 수객과 동향인 노동자들은 혈연 및 지연이라고 하는 꽌시와 그 꽌시에 기반 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소중한 임금 및 안부편지를 고향의 가족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수객이 취하는 수수료는 10%였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정(郵政)시스템, 은행, 전신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19세기 초중반, 심지어 후반까지도 수객을 통한 송금전달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도 수많은 사연이 존재한다. 통통배라 불리는 작은 정크선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향하던 수객이 풍랑으로 목숨과 함께 교비들마저 잃어버린 사연, 어느 비열한 수객이 노동자들의 피땀과 눈물이 어린 교비들을 최대한 많이 모은 뒤에 신뢰를 저버리고 중간에서 가로챈 사연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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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수객의 전성기는 주로 19세기 초중반이었지만, 사실 그 명맥은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개인간 꽌시를 통한 송금을 선호한 화교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1930년에서 1944년까지 광동 조산(潮汕)지역에서 수객을 했던 오자순(吳字順)’의 유품이다. 각각 안경, 주판, 나무저울(은원銀元으로 송금했을 경우 은 함유량을 재기위한 도구. 무역활동에도 사용), 간편 상비약, 다구, 물품보관 항아리, 장부 등이다.

출처: 광동성 산두(汕頭) 소재 교비문물관(僑批文物館). 필자촬영

 

교비의 전달을 통한 수객의 수입은 주로 교비를 종자돈으로 행한 무역수입과 수수료였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증기선을 통한 항해가 없어 정크선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교비전달 속도는 매우 느렸다고 한다. 복건남부, 민남지역의 유명한 교향중의 하나인 용춘(永春)지역에는 “간나디, 간나디, 3년에 교비 한 장(幹那低, 幹那低, 三年一張批)” 이라는 말이 구전되어 내려져 온다고 하는데, 여기서 간나디는 현재 인도네시아 테르나테(Ternate)섬을 가리킨다. 테르나테섬은 해상실크로드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동남아시아 향신료계의 대표선수, 정향(丁香)의 원산지로 유명하며 일찍부터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내용인즉 답신을 포함하여 교비를 삼년에 한 번 받는다고 할 정도로 극악한 횟수를 자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하게 된 것은 1840년대 이후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 사이에 증기선을 통한 정기항로가 배정되면서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교비를 전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그에 따라 수객들의 수입 역시 증가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입의 증가는 기업형 송금기관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 복건의 지역민들은 수객을 굉장히 반기고 기다렸다고 한다. 물론 정확히는 수객들이 배달해 오는 가장의 송금을 기다린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실제 교비는 가정경제에 큰 보탬이 되는 수입원이었는데, 민남지역의 진장(晉江) 사람들 사이에는 교비가 오면 집이 새로 지어지고, 담벼락은 벽돌로 지어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정경제뿐만 아니라 마을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 주요 자금원이었다. 심지어 가장이 보내주는 송금의 양에 따라 각 가정 사이에 빈부 격차가 발생할 정도라고도 하고, 또 송금을 가지고 쓸 궁리만 하는 아내에게 남편의 잔소리가 적힌 편지가 전해지기도 하는 등, 각종 사회현상들이 발생하기에 이른다(물론 이 편지에서 남편의 가장 효과적인 협박은 그렇게 쓸 궁리만 하면 송금을 끊어 버리겠다는 엄포였다고 한다). 그리고 노부모 혹은 조부모의 입장에서는 이역만리 타지에서 고생하는 아들 혹은 손자의 소식을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수객은 고마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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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수객 혹은 교비배달부(신차 혹은 비각)가 화교가족에게 교비를 전달하는 모습

출처: 광동성 산두(汕頭) 소재 교비문물관(僑批文物館). 필자제공

 

또한 대부분의 해외 노동자들이나 복건의 가족들은 글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객 혹은 수객을 대신하여 교비를 배달해 주는 신차(배달원)들이 그들의 안부편지를 대필 및 대독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객들이 가져오는 동남아시아와 서구의 진귀한 문물들, 그리고 그들이 전해주는 해외의 신기한 이야기 및 경험 등등은 근대 복건, 특히 민남지역사회의 해외인식을 형성해 주었다. 수객들은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신문명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수객은 단순히 교비를 전달해 주는 전달자였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거주 복건인 공동체와 중국 대륙의 복건 지역사회를 하나로 연결해 줌으로써 복건의 지역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중요한 매개체였다고도 할 수 있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4

 

김종호 _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