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육로로 우즈벡으로 넘어갔다. 키르기즈스탄 오쉬와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국경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표본이다. 6년 전에는 한산하니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그 때는 국경이 사실상 닫힌 상태였으니까. 오쉬 폭력 사태 이후 국경 교류는 뜸하다가 작년에 전면적으로 개방되니 지금은 매일 인산인해다. 그 대부분이 우즈벡 ‘보따리상’들이다. 말이 보따리상이지 그들이 옮기는 물건들은 냉장고부터 기계까지 없는 것이 없다.
국경을 건너려면 좁은 철망 사이로 들어가야 하는데, 꼭 밀식 사육 닭장 같은 백 평도 안 되는 병목 구간에 수백 명(아니 천명은 되었다)이 들어가니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짐을 들고 몇 분에 한발씩 움직이는데, 밀치기와 끼어들기는 20년 전 중국의 기차역은 약과였다. 내리쬐는 직사광선에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하고, 기진맥진한 환자를 옮기는 장정들 뒤로 새치기 행렬이 뒤따랐다. 그래도 곧 끓어오를 듯한 군중의 물결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닭장을 넓히든지 세관 인원을 늘리든지 조치를 취해주면 좋으련만, 언제 이런 소박한 소망이 실현될지는 모르겠다. 이 닭장 구간에서 만인은 서로 투쟁하지만 또 쉽사리 사귄다. 나는 젊은 우즈벡인 엘벡과 그 동향 어떤 여자분과 함께 움직였다.
닭장에서 본 유일한 키르키즈인 소녀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가나?” “대신 날라주는 거야. 얼마 받고.”
엘벡은 물건을 옮기고 수수료를 받는 짐꾼이다. 물론 다른 직업이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안디잔 남자들 다수가 이 일은 한다. 일정 금액 일정 무게는 개인 짐으로 분류되어 관세를 면하는 듯하고, 어쨌든 소규모 화물을 옮기는 데는 여전히 인간의 근력이 다른 운송수단보다 싼 모양이다. 그날 나는 그 여자분의 짐을 날랐다. 호기롭게 짐을 달라고 해서 받았지만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가방 하나가 오십 킬로는 되었다. 그 안에는 모조리 중국산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허리는 시큰거리고 물 대신 마신 마유주가 뱃속에서 꾸룩꾸룩 거리는 차에 무거운 짐을 한 발자국마다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니 식은땀이 삐죽삐죽 났다. 이 국경은 병목 구간이 두 개 있다. 닭장 병목 구간에서 짐을 인계하고 안도의 한숨을 지었는데, 두 번째 닭장 구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뚜리스뜨(여행자)!”
그 여자분이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인파에 밀려 갈 데도 없어 다시 그 짐을 날랐다. 어렵사리 국경을 넘으니 짐을 나르는 차들이 빽빽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직업병이 도져 재미있는 현상들을 기록했다. 먼저 짐을 옮기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우즈벡인들이다. 우즈벡에서 키르기즈로 들어가면 길 건너편에는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화물의 흐름은 일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짐은 대부분 중국산 가전제품과 잡화 혹은 기계 부품이다. 정식으로 통관하는 커다란 트럭들도 있건만, 세탁기와 냉장고까지 사람이 옮기며 경비를 절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들은 바에 의하면 불과 몇 년 전까지 상당히 많은 중국인들이 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날 국경을 통과한 이들도 최소 2천 명은 넘을 텐데, 중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중국산 물품을 실은 거대 트럭들은 물론 예전보다 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물건은 그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이 국경 도시에서 사라진 중국인들은 누구일까?
키르기즈로 돌아오는 길, 오쉬 주재 중국인 공동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옛 버스 터미널 옆 북경반점을 찾았다. 6년 만에 찾은 오쉬 북경호텔은 외양은 그대로다. 그러나 호텔 옆 분수대는 물을 뿜은 지 한참 된 듯하다. 호텔에 붙여 상가로 조성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가구점과 전자제품 가게들이 있지만 사람은 뜸하다. 그 건물을 벗어나서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 중심방향으로 난 거리의 구상가로 들어가면 인파는 여전했다. 중국 상인들이 시가지를 점령할 것이라던 몇 년 전의 예상은 빗나간 듯하다. 버스 정류장 오쉬 국립대학 공자학원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수는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그 옆에 있는 상해반점은 간판마저 초라하다. 겉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뒤죽박죽의 상황이었다. 물론 공신력 있는 통계도 없다. 중국측 <제로일보(齊魯日報)>가 키르기즈스탄 이민국장의 말은 인용한 것에 의하면 2017년 키르기즈스탄 외국인 노동자 1.47만 명 중 1.1만 명이 중국인이라 한다. 물론 거의 전부가 중국 회사에서 고용한 인력들이다. 그러나 오쉬에서만 그 이상의 인구가 빠져 나갔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북경 반점 상가
터미널 옆 - 오쉬국립대학교공자학원
호텔 옆에 붙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직 11시,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내가 첫 손님이었다. 사장 두(杜)싱화(이름을 기록하지 못해 발음대로 쓴다)는 2008년에 이곳으로 와 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차를 좋아하는 대단히 여성스런 면이 있는 무한 사람이었다. 중국인답게 먼저 차 이야기다. 그는 나를 위해 철관음을 준비하겠단다. 올 해 난 차는 진했다.
“매운 것 좋아하세요?” “아주 매운 것이면 좋겠습니다.” “그럼 마파두부 어때요? 우리 주방장이 중경 사람이라 아주 정통으로 만드는데.” “그래요? 제 처도 중경 사람입니다.” “그럼 마파두부하고 중경소면을 드시죠?” “중경 술도 있으면 한 병 주시죠.”
이리하여 술 한 병을 시켜 놓고 그와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6년 전보다 중국 사람들이 더 적어진 것 같아요. 지금도 여기 몇 천 명은 있나요?”
“아직 몇 천 명이야 되지요(만 명은 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근래 많이 줄어들었지만.”
“뭘 하던 사람들이죠? 왜 그렇게 줄어들었나요?”
“뭐, 단속‧마찰 때문이지요. 일도 줄었고.”
두 선생과 나
그 이상은 미안스러워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줄어든 것은 공사 구간이 옮겨갔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한 점은 여기 머물던 만 명 단위의 중국인들 다수가 불안한 신분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담당했던 일의 일부는 우즈벡인이나 현지인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대개 길이 좋아지면 잡일이 줄어든다. 중국산 물품은 더 대량으로 들어와 국경을 한 번 더 넘어 우즈벡까지 들어가지만, 꼭 중국인들이 옮기고 처리할 필요는 없다. 국경을 넘는 차량의 국적은 대개 키르기즈, 기사들도 거의 전부가 키르기즈인이다. 중국에서 오쉬로 대량으로 들어온 물품들이 일단 환적되는 모양이다. 상주 중국인들이 줄어들면서 자국민을 대상으로 식료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던 이들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육로 국경 근처에 있는 이들은 이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민들이지만 대체로 자본이 없는 이들이다. 자본이 있는 이들은 몸은 비행기로 국경을 넘고, 물품은 트럭으로 넘기면 그뿐이다. 자본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중국이 차관을 지원해 만든 길을 통해 중국산 물품이 국경을 넘고, 중국 자본이 중국 물품을 대량으로 유통시키는 동안 중국의 소상인들은 돌아갔다. 대규모 자본은 현지인들과 마찰을 피해 상품을 유통시킬 수 있지만, 현지인을 직접 상대하는 소상인들은 사업이 잘 될 때는 질시를 받다가 사업이 안 될 때는 철수할 도리밖에 없다. 중국 건설 회사들은 여전히 중국인들을 쓰지만, 전체적인 자본의 흐름은 변경 소상인들에게는 우호적이지 않은 듯하다. 떠나간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연계망 속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조사하자면 수개월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썰물처럼 빠진 그 움직임을 보면, 그들이 정책과 시류에 휩쓸리는 불안한 처지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닭장 구간을 벗어났건만 그 경험이 자꾸 떠오른다. 닭장 안에서 일사병 환자들이 속출할 때, 트럭의 행렬은 유유히 대로를 빠져 국경 건너로 이어졌다. 수천 인파 중 일부는 분명 자본을 축적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가 과연 저 기계와 경쟁할 수 있을까? 닭장 안에서 소인(小人)들이 얼굴 붉히며 부딪히는 사이 얼굴 없는 거인은 한 걸음에 국경을 뛰어넘는 듯한 환영을 벗어날 길이 없다.
【변경에서 바라본 중국 9】
공원국 _ 작가 / 중국 푸단대 인류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