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희, 「민국시기 신용합작사의 전통 ‘錢會’ 방식의 활용-하북성 定縣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77집(2018.3), 55-89쪽.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행했던 합작사운동은 1920-30년대 중국에서 향촌건설운동의 일환으로 각종 사회단체 혹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합작사는 수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조직은 건전하지 못했고 보편적인 활성화는 이룩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전통 전회(錢會)의 방법을 신용합작사에 접목시키게 되는데, 본고는 하북성 정현(定縣)을 대상으로 이러한 양상을 검토한 것이다.
하북성 정현의 신용합작사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의진회(義賑會)와 평교회(平敎會)였다. 이들 사회단체는 정치와는 무관하게 농민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농촌의 경제부흥을 외치며 합작사운동을 지도했다. 특히 평교회는 평민학교(平民學校) 동학회(同學會)를 중심으로 농민들을 계몽시켰고, 농민과 소통하며 교육의 방법을 통해 합작사가 농민의 자립적인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남경국민정부도 합작사운동에 관심을 갖고 정현을 실험현으로 정했으며 현정건설연구원(縣政建設硏究院)을 설립함으로써 현정(縣政) 건설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주도에도 불구하고 의진회와 평교회가 정현에서 축적한 사회적 기초와 역량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교회의 모든 활동은 사회조사를 통한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실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농촌경제를 개선하고 합작사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기본조사로서 정현의 고리대(高利貸), 전당(典當), 요회(搖會) 등 농촌금융에 대한 현지조사가 행해졌다. 조사의 결과, 농민들은 여전히 고리대나 전당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융통하고 있으며 이를 피하는 방법으로 전회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전회는 혈연과 지연 등 인적 결합을 그 원리로 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다는 윤리의식과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 특히 정현에서는 전회를 조직할 때 주석(酒席)의 방법에 따라 전회의 명칭을 달리했는데, 이는 전회가 농민들에게 준 경제적 의미 외에 사회적 의미도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면 합작사와 사원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합작사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지 않았고 조직은 건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농민들을 합작사에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합작사 속에 전회를 조직하는 방법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합작사가 회수(會首)가 되어 합작사 내부에 전회를 조직하여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는 농민들의 관습을 정면으로 거슬리지 않으면서 전회의 ‘불건전’하고 ‘불합리’한 부분은 제거하고 장점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논의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현농민실험은행이 전회의 방법을 제창하여 합작사가 전회를 겸할 것을 결정하고 업무 준칙을 공포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준칙의 대부분은 전통 전회의 기본적인 방법이나 규정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현에서 사회조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농민들의 실제상황과 그들의 절실한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를 주도했던 사회조직인 의진회와 평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교회는 농민들의 실제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이론과 방식대로 전통의 방법을 접목시켜 실천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강소성, 절강성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이 정부의 주도와 간섭으로 국가의 합작사업에 대한 장악 정도가 컸던 것에 비하면, 정현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교회가 그 영향력과 사회세력으로서의 우위를 견지해나갔다. 이는 국가가 향촌건설의 주도권을 잡기도 전에 이미 평교회가 정현에서 상당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국가에 의존하기 보다는 사회운동으로서의 신용합작사 운동을 견지하고 사회조직을 중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