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는 1819년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한 직원이 말레이시아 반도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서울만한 섬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래플스는 싱가포르의 지리적 잠재성을 포착하고, 말라카를 대신할 동남아 무역의 허브 도시로 만들기 위해 영국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삼을 것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후 도시건설을 위해 말라카 및 페낭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들을 대량으로 이주시키면서 본격적인 항구도시로서의 외양을 갖추게 된다. 그 영향으로 싱가포르의 인구구성은 평균적으로 중국계가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싱가포르 대중 및 학계는 영국에 의한 식민 경험을 그리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애초에 중국계 이민자들의 경우 영국이 발견하여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인프라를 건설한 싱가포르라는 도시에 기회를 찾아 그 열매를 향유하기 위해 이주한 이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1965년 말레이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이후, 싱가포르가 국제 무역, 금융, 관광 도시로서 아시아의 부자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러한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영어의 사용, 무역 및 금융 시스템, 대영제국의 일원이라는 프리미엄)한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영국이외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었다는 점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을 습격함과 동시에 전선을 동남아시아로까지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형성이다. 일본은 동남아 점령 및 통치의 핵심지역으로 싱가포르를 상정하고, 1945년 2월 15일 영국을 패퇴시키면서 군정(軍政)을 설치하였다.
사진 1 일본은 싱가포르를 점령한 직후인 1942년 2월 20일에 ‘Syonan Times’를 배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미 전쟁이전부터 동남아시아의 무역 및 금융허브였던 싱가포르의 중요성 때문인지 일본군은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식민 지배의 거점으로 삼기위해 군정을 설치하면서, 명칭 역시 쇼난토(昭南島 Syonan-to)라고 개칭하였다. 사실 일본은 동남아 침공을 계획하면서 싱가포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경제력까지 풍부한 화교들에게 주목하여 점령 이전부터 이미 「항일화교명부抗日華僑名簿」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100여 명이 넘는 항일단체 지도자와 임원 그리고 주요 회원들의 주소를 미리 파악해 놓고 점령이후에 모두 교외로 끌고 나가 기관총과 총검으로 학살했는데, 이를 소위 ‘숙칭(Sook Ching 肅淸)’사건이라 부른다. 이 대량학살은 3월 10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일본이 벌인 ‘숙칭’사건은 화교 기업가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반 화교주민들 및 말레이/인도 주민들에게까지 학살의 범위가 미치게 되어 통계에 따라서는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싱가포르 거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알려진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다.
사진 2 복건성 하문廈門대학의 임문경(Lim Boon Keng 林文慶) 동상.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계속되자 싱가포르의 저명한 화교지도자이자 의사, 기업가, 문인, 사회사업가인 임문경은 일본군을 찾아가 학살의 중단을 요청하였고, 일본군이 내건 조건에 따라 친일적 성격의 ‘쇼난시화교협회昭南市華僑協會’를 설립하여 일본의 군자금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 식민 지배의 과정 동안 싱가포르인들은 위와 같은 일본 군대의 대규모 학살사건과 각종 자원 및 인력의 수탈을 경험하는 등, 지금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식민 지배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만큼 1945년의 종전과 해방은 그들에게 특별한 순간이었을 것인데, 최근 이 종전의 경험을 기념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져 눈길을 끈 바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종전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 포드 자동차 공장건물을 개조해 ‘Old Ford Factory Museum’이라는 명칭으로 개장하여 시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려 하였다. 게다가 이 구(舊) 포드 공장 건물에서 일본 군정과의 종전 협상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러다 최근 1-2년간 이 박물관을 다시 개조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사학자들과 연구자들의 자문을 구하였고, 2017년 1월 재개장하면서 ‘쇼난 갤러리Syonan Gallery’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 식민 지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여 올바르게 기억하자라는 취지였지만, 마치 일본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듯한 뉘앙스 때문에 일반대중 및 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그 명칭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이에 리셴룽 총리가 2017년 2월 17일 ‘쇼난 갤러리’라는 이름을 폐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본식민의 상처가 여전히 싱가포르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사진 3 개장한 ‘쇼난 갤러리Syonan Gallery’ 명칭이 폐기되는 모습
이러한 논쟁과는 별개로 사실 싱가포르의 경우, 이미 대학 학부 1학년생부터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 및 지배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역사인식을 가르치고 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싱가포르에서 벌인 학살들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구 식민 세력의 퇴각(싱가포르의 경우 영제국)이라고 하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독립사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본 군대의 침략에 의해 발생했다는 지점 역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게는 이백 년 이상, 짧아도 백 수 십년에 이르는 서구 제국에 의한 식민지배로 동남아시아 인들, 특히 싱가포르인들의 정체성은 이미 서구 문명에 강하게 동화된 측면이 있었다. 즉, 많은 동남아인들, 그 중에서도 엘리트 계층의 경우 상당부분 스스로 제국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제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일본의 침략과 서구 세력의 축출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스스로를 제국과는 다르다고 하는 독립성 및 원주민들과의 공동체 의식(sense of belonging)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해방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계기”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지점이 중요하다. 천재지변과 같은 느낌으로 그 어떠한 가치판단을 가지지 않으면서, 그 의도야 어떠했든 간에 일본의 침략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동남아시아라고 하는 독립된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교육하고 있다.
짧은 역사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점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역사교육 및 역사인식은 중요한 시민 교양 가운데 하나다. 물론 우리의 식민경험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영국과 일본에 의한 식민을 기억하는 법을 비교해 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3】
김종호 _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이미지 출처
쇼난 타임즈 Syonan Times https://www.pinterest.co.uk/pin/328833210270066005/
쇼난 갤러리 폐기 https://www.straitstimes.com/singapore/war-gallery-name-change-a-time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