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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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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건성 민남인은 어떻게 화교가 되었나(2)_ 김종호

중국 복건성 민남 지역민들의 이민사에는 객두(客頭)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이민브로커지만, 그리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이민 브로커이면서 수객(水客)이라 불리는 소무역상이기도 하고, 객잔(客棧의) 주인이기도 하며, 혹은 이민자들의 선배이민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출신 고향으로 돌아가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외국의 상황, 본인 및 다른 이민자들의 성공담 등을 현실적으로 혹은 장밋빛으로 설명하면서 같은 고향 출신의 새로운 이민자들, 즉 신객(新客)들을 모집하여 하문(廈門)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하문의 객잔에 모여 노동계약을 맺고, 계약금, 객잔비용, 동남아로 가는 뱃삯, 싱가포르에 머무르는 체제비 등에 각종 커미션을 붙여 신객들에게서 받는다. 그러나 대부분 가난한 어린 소년이나 젊은 청년들이었기에 돈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객두가 그 비용을 대출해주고 나중에 이자를 쳐서 받는 식이었다. 주로 월급에서 차압하는 식이었다고 하는데, 객두는 신객들과 함께 싱가포르로 가서 뒤처리까지 해주는 경우도 있고, 싱가포르에 도착한 신객들에게 다른 객두가 나와서 직업을 알선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일자리를 구할 때 작동했던 것이 동향조직의 네트워크였다. 소위 회관(會館)이니 방(幇)이니 하는 동향의 조직을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 조직되는 이러한 동향조직은 신객이 들어오면 일자리를 알선해 주고 편의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근대적 제도가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 이민사회에서 동향조직은 새로운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정착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작동기제였다. 객두 역시 동향의 후배들을 모집하여 동남아의 동향조직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싱가포르에 모이는 민남(閩南: 복건성 남부)출신의 신객들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보루네오 섬 등으로 각자의 일자리를 구해 흩어지게 된다. 필리핀의 경우 싱가포르 못지않은 대항(大港)이었던 마닐라로 직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유한 상인들이 이렇게 동향조직을 결성하여 새로운 이민자들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고향선배의 아량이라는 순수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의 부유한 화상(華商)들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건설한 대농장 및 광산을 대리경영하면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았고, 대리경영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여기에 말이 통하고 근면하며 동기부여가 확실한 동향의 이주민들은 매우 적합한 노동 자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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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민남지역 대표 교향중 하나인 진강(晉江)지역 이민자 동향조직인 진강회관(晉江會館, 싱가포르 소재)

 
그들 대부분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골드러쉬가 한창이던 미국으로 건너가 금은 광산채굴과 철도 건설을 담당했던 수많은 광동인들의 경우 한 달 14센트만을 소비하면서 방 하나에 수십 명씩 거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런 중국인들의 지독함에 미국인들이 두려워하고 질렸을 정도였다고 하니, 동남아의 민남 출신 노동자들 역시 그러한 근면함을 보였을 것이다. 실제 1901년 싱가포르 정부에서 조사한 해협식민지(싱가포르, 말라카, 페낭)의 인구밀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이주자들이 주로 밀집해 있는 지역의 한 가구당 거주인의 숫자는 평균 11-1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근면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힘든 노동과 열악한 환경,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그 생활이 참으로 비참했음을 잘 보여준다. 어쨌든 도시의 점원, 인력거꾼, 대농장의 노동자, 광산의 광부 등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남아 식민지 산업의 주요 노동 자원이었던 이들 중국인 해외이민자들의 주요 목표는 금의환향 혹은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의 처자식,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 노동력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및 탈북민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또 이런 점에서 반복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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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41년 싱가포르의 아편굴(opium den). 각 침상마다 아편흡연도구들이 놓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이미 수많은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대량중독은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아편을 대량 재배한 유럽 식민제국과 그 아편농장을 대리경영하면서 이득을 취한 화상(華商)들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민남인들을 비롯한 중국인 해외이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 중반까지다. 그 계기는 청(淸)의 태도 변화였다. 남경조약(1842) 전후에만 해도 청조는 자국민의 해외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잡히면 즉결처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남인들은 꾸준하게 해외도항을 시도하였지만, 법적으로 해외이주가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민의 흐름에 꽤 큰 장벽이었다. 그러다 1860-70년대가 되면, 외부와의 잦은 교류로 인해 청조의 관리들은 서서히 해외 중국인들의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특히 경제력 부분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즈음이 되면 해외이민자들 가운데 부유한 상인들이 서서히 출현하게 되는데, 몇몇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부를 축적하여 2세대, 3세대를 형성한 상인가문들도 있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쌓은 부의 일부를 본인들의 고향, 소위 교향(僑鄕)에다 투자하기 시작하였고, 지방 관료들의 경우 그들의 투자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근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닫고 중앙정부에 그 존재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양광총독(兩廣總督)이었던 장지동(張之洞)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또한 서구식 문물이 유입되면서 청조의 엘리트들 사이에 서서히 해외 거주 중국인들을 서구식 ‘근대국가’의 개념에 기초하여 바라보게 되는 인식상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1877년, 싱가포르에 영사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890년대에는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해 주는 법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민남인을 비롯한 중국인들의 해외 노동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 과정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지칭할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청조의 경우 기존에는 해외 도항자들을 기민(棄民)시하여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백성취급을 했지만, 그들을 국가의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한 이후에는 다른 용어의 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세기 후반 청조에서 정립한 용어가 바로 ‘화교(華僑)’이다. ‘화(華)’는 중화의 ‘화’이고, ‘교’는 위진남북조시기부터 쓰인 용어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한다. 즉 ‘화교’는 중화인으로서 (다양한 목적으로) 해외에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교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귀향 혹은 귀국을 담보로, 잠시 머무르기 위해 동남아 및 홍콩으로 진출하여 무역과 노동에 종사하는 중국계 이주자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후 화교들 가운데에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학계에서는 해외에 영구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들의 경우 ‘화인(華人)’으로 달리 분류하고, 그들의 2세대, 3세대 후손들을 ‘화예(華裔)’라고 지칭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복건성 민남 출신의 동남아 이주민들의 경우 천주가 대항으로 자리잡게 되는 근세시기부터 근현대를 거치면서 수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화교, 화인, 화예가 얽혀있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필자를 포함한 관련 연구자들의 골머리를 썩게 하기도 한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

 

김종호 _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Main_Page)
Rare historical photos (https://rarehistoricalphotos.com/)

진강회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hin_Kang_Huay_Kuan,_Singapore_-_20070819.jpg
아편굴 https://rarehistoricalphotos.com/opium-den-singapore-1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