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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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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왕치산의 귀환 _ 양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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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붉게 물든 낙엽과 함께 홍조를 띠고 떠나갔던 왕의 남자가 춘삼월 꽃피는 봄날 다시 돌아왔다. 바로 왕치산(王岐山)이다. 지난 2003년 베이징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른바 사스(SARS)를 진압할 전염병 관리 야전군 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되어 베이징으로 귀환한 그가 바로 왕치산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제대화에서는 미국과의 갈등을 관리하는 특급 조련사로서 미국을 능수능란하게 상대했다.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인민은행장이나 국무원 부총리로서도 활약하며 경제 실무에도 밝은 경제통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 그가 18대 시진핑 집권과 함께 살생부를 손에 쥔 부패 관료들의 저승사자로서 시진핑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반부패 운동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올 봄 만 70세 생일을 네 달 정도 남긴 지금 다시 국가부주석의 명찰을 달고 시진핑 주석 옆으로 귀환했다.

 

왕치산의 귀환은 은퇴한 정치국 상무위원이 다시 평당원 신분으로 국가기구 주요 보직을 맡았다는 점에서 생경한 일임은 분명하다. 물론 평당원 신분으로 주요 국가기구 책임자를 맡지 못한다는 당내 규정이나 헌법 규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치산의 귀환은 지난 만추(晩秋)에 지는 낙엽과 함께 박수 받으며 떠난 사람이기에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왕치산의 귀환은 제도적인 가(), 불가(不可)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왕치산은 시진핑과 함께 상상되고 인지되고 또 시진핑 사람이라고 간주되는 상황에서 그의 귀환은 당연히 시진핑 주석의 권력 강화와 연계되어 읽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평당원의 신분으로 현 정치국 상무위원 바로 뒤 여덟 번째 의전서열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가 시진핑 집권 2기에서 서열 8위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헌법 79조 조항을 일부 수정하면서 국가주석과 국가부주석은 연임도 가능하다. 물론 왕치산이 연임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석과 부주석은 이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일종의 하나의 조합이 되었다는 점이다. 헌법상 국가주석은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부주석은 주석을 보좌하여 국가사무를 수행한다. 사실상 2인자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왕치산은 자신의 전공인 경제, 외교, 사정(司正) 뿐만 아니라 주석이 간여하는 모든 업무에 사실상 전방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물론 권한과 의무에 걸맞은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인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정치적으로 감내해야할 위험으로 연결된다는 점도 도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핑 주석이 다시 그를 소환한 것은 이른바 신시대를 열어가는 데 있어서 그가 필요했고,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국인대는 헌법 수정을 통해서 중국공산당 영도를 헌법적 가치로 격상시켰고, 헌법 보장을 통해서 당의 영도를 최상의 가치로 높였다. 이는 당의 영도가 헌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당의 영도에 헌법이 복무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위해서 당도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기존 시각과 관점을 뛰어 넘는 것이다. 오히려 필요시 당의 영도를 위해서 헌법이 복무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의 영도를 관철하기 위한 앞길을 개척해나가는 데 왕치산만한 사람이 없다는 점도 시진핑 주석이 그를 간택한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치의 오랜 관행으로 자리 잡은 이른바 당과 정부는 분리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 한다는 정치관행과의 이별 혹은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덩샤오핑의 정치적 유산과의 결별 혹은 변형이기도 하다. 시진핑 주석이 힘주어 강조하는 이른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사실 덩샤오핑의 정치적 유산을 안고 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모든 유산을 다 안고 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시대는 신시대의 내용을 담아내야하기 때문이다. 당과 정부의 관계 재설계와 재규정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201735일 당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던 왕치산이 제12기 전국인대 제5차 회의 베이징 대표단 전체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왕치산은 현안이던 국가감찰법 제정 관련 내용을 설명하면서 당의 주장이 국가의지가 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이 결정하는 대로 국가가 이에 조응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즉 당의 결심이 바로 국가의 결심이고 인민의 결심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당은 당이고 국가는 국가이며 당은 큰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사무는 전국인대를 통해서 행정기관에서 집행한다는 개혁개방 시기 정치관행과 약간 다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왕치산은 정부의 개념을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하면서 당이 광의의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부언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인민들은 당기관(党的机关), 인대기관(人大机关), 행정기관(行政机关), 정협기관(政协机关) 그리고 법원과 검찰원 모두를 정부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은 이 모든 것을 영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즉 당의 입장에서 보면 오직 당정분업(党政分工)이 있을 뿐 당정분리(党政分开)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정분리는 앞서 언급한대로 덩샤오핑의 정치적 유산이며 개혁개방 시기 늘 강조되던 일종의 정치적 관행이었다. 80년대 초반 사회주의 현대화로의 발전 방향을 조정하면서 덩샤오핑은 정부와 기업의 적극성과 자율성을 개혁개방의 성과를 창출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다. 당연히 당의 지나친 개입이나 간여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치개혁이 진행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당시 “(정부의)효율이 높지 않은 것은 기구가 방대하고(机构臃肿), 일에 비해 사람이 많고(人浮于事), 일을 질질 끄는 풍조(作风拖拉)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바로 당정이 분리되지 않은 것(党政不分)”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많은 상황에서 당이 정부 업무를 대신했고 당과 정부의 많은 기구가 중복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의 영도를 견지하기 위해서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말하고 당정분리를 주장했다. 이는 당과 정부를 분리하여 정부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이 개혁개방의 길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왕치산은 지난 가을 당정분리는 없고 오직 당정분업만 있다고 해서 덩샤오핑과는 약간 다른 정치적 뉘앙스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헌법 수정과 당의 영도 강화는 그의 귀환과 더불어 시진핑 집권 2기에서는 당의 영도가 매우 강력한 정치개혁의 방향이 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왕의 남자의 귀환은 사실상 당의 영도를 강화하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난 19차 당대회 이후 변화 그리고 이번에 개최된 제13기 전국인대 결과를 보면 당정분리가 다시 당정합일(党政合一) 그리고 당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국가발전론 시각에서 보면 사회자원과 정치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왕치산과 같은 왕의 남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발전론 시각에서 보면 이는 덩샤오핑이 구축해 놓은 정치제도화라는 예측 가능한 정치의 변용을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왕치산의 역할이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양갑용 _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연구실장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ng_Qishan_(cropped).jpg